▲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기원전 330년 무렵 아리스토텔레스는 전대미문의 서책 `시학`을 출간한다. 일찍이 인류가 가져본 적 없던 문예이론서 `시학`. 언뜻 보면 `시`에 관한 서책처럼 보이지만, 실은 문학에 관한 전문서적이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공을 들인 대목은 비극이다. 역사와 비극을 견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의 특수성(特殊性)과 비극의 보편성(普遍性)을 설파하면서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을 “공포와 연민(憐憫)에 기초한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했다. 비극의 주인공이 경험하는 운명의 격랑(激浪)과 고통에서 발원하는 공포를 관객이 경험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낌으로써 감정을 정화(淨化)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폴리스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가능성을 비극이 제공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락과 교훈에 기초한 고전적인 미학을 정초(定礎)한 게다.

이쯤해서 21세기 한국사회의 공포와 연민을 잠시 돌이켜보자.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는 공포는 있지만 연민은 없다. 어쩌면 공포가 만연해 있는 `공포사회`라고 한국사회를 단정(斷定)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하루 40명 넘게 자신을 죽여 버리는 끔찍한 자살 공화국, 매년 2천명 넘게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의 지옥,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사건사고가 빈발하는 후진적인 재난(災難) 공화국.

사정이 이럴진대 일상화된 재난과 자살 공화국에서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한국인에게 공포는 공기나 물처럼 자연스러운 동반자(同伴者)가 되고 말았다. 공연장이나 공사판에서 열 몇 사람 죽어나간다 해도 웬만한 한국인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과 말투로 일상(日常)을 영위해 나간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죽음에 무신경해진 공포사회의 단면(斷面)이다.

만연한 공포와 달리 한국사회에 연민은 완전히 결여(缺如)되어 있다. 이웃이나 그 너머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재난 따위에 가슴 아파하거나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배제(排除)된 연민의 감정은 가족이나 제한된 틀 안의 인간관계로 과잉(過剩) 표출된다. 그리하여 과잉의 가족주의(家族主義)와 연고주의(緣故主義)가 횡행(橫行)한다. 여기서 혈연과 지연과 학연의 괴물(怪物)이 꿈틀댄다.

지난 4월 28일 `세월호 참사(慘事), 1년을 말하다!` 콜로키움을 경북대에서 개최했다. 단원고 희생자 김동엽 학생의 부모님을 모신 특별한 자리였다. 두 시간 남짓 진행된 행사를 마치고 돌아본 강당에서 낯익은 교수들의 얼굴은 대여섯 남짓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공포와 충격(衝擊)`이었다. 아아, 이것이 경북대 교수사회의 민낯이구나! 뒤통수가 얼얼했다. 가슴에 서늘한 썰물이 일었다.

대학의 존립근거 하나가 `정의(正義)와 불의(不義)`를 구별하여 가르치는 일이다. 한국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정리(情理)를 가르치는 것이다. 지식과 기능의 전수(傳受)는 그와 같은 사회적-윤리적 교양에 기초할 때 비로소 제 구실을 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시민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덕성(德性)과 소양(素養)을 함양(涵養)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보고야 말았다. 만연(漫然)한 공포사회에 완전 결석한 연민사회의 실상을 그날 목도하고야 말았다. `세월호 참사`가 나와 가족과 친구와 친지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아버린 허다한 인간들의 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실체를! 하기야 “이제 그만하자!”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외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형편이다. 또 다른 대형공포를 예감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杞憂)일까?!

공포와 연민에 기초한 카타르시스를 공동(共同) 체험하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하나로 결속(結束)하여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공포는 차고 넘치는데, 연민은 사라진 한국사회를 보면서 허망(虛妄)하고 다시 허망하다. 황망(慌忙)하고 다시 황망하여 몸과 마음을 건사하기 어려운 봄날이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