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인문대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인문대학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漫)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위엔 하늘이 무거운데/연련(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山河.”

해마다 4월 19일 그날이 오면 즐겨 암송(暗誦)하는 시 `진달래`전문이다. `진달래`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진달래`를 지은이는 시조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이며, 유치환의 연인 이영도다. 이영도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유치환은 죽을 때까지도 시로 읊었다. 여러분도 아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나니라” 하고 시작하는 `행복`을 기억하시리라.

20대에 청상과부 된 이영도가 유치환의 구애(求愛)를 오래도록 거절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이영도는 그의 끈질긴 구애에 감동하여 마음을 내준다. 훗날 이영도는 자신을 낳아준 고향 청도에 정착하고, 아내와 자식이 있었던 유치환은 부산으로 발령받는다. 여기서부터 유치환과 이영도의 편지를 매개로 한 사랑이야기가 시작한다. 그 절정(絶頂) 가운데 하나가 청마의 `행복`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하되, 나는 청마(靑馬)의 어떤 시보다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를 사랑한다. 산등성이 곳곳을 마치 꽃 사태라도 난 것처럼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를 4·19혁명 당시 피 흘리며 죽어간 청년들과 선연(鮮然)히 대비시킨다. 그리고는 이린 영혼들을 보내고 욕되게 살아남은 나이 먹은 자의 우울과 슬픔을 영탄조로 노래한다.

청춘들이 흘린 피 값으로 얻어낸 자유와 민주주의를 공짜로 향수하는 기성세대의 절망적인 무력감과 무임승차에 대한 죄의식을 아프게 지적한다. 절창(絶唱)이다.

지난 19일 4·19혁명 55주년은 혼란과 탄식과 한숨 속에서 시나브로 스러져갔다. 작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로 인한 유가족의 슬픔이 하늘을 찌른다. 그분들을 위로하고 원통한 혼령을 위하여 모인 시민들에게 경찰은 차벽과 최루액과 물대포를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鎭壓)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이 나라 국민 304명이 고스란히 수장된 그날의 절망과 슬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원외교`의 불똥을 맞은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과 그가 남긴 부패정치인 명단으로 나라 전체가 기우뚱하고 있다. 일국의 총리가 사임을 발표하고 수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더 많은 고위직들이 뇌물수수(物授受)로 철창에 가야할지 모르는 정국이 마냥 어수선하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진 자들이 21세기 대명천지에 뇌물을 받아 챙겼다니! 그자들이 입만 열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지껄여댄 이른바 `국격`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런 혼란과 절망과 탄식(歎息) 속에 4·19혁명은 조용히 잊혀졌다. 이승만 독재 12년에 저항하여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200여명의 청춘들은 2015년 4월 완전히 망각된 채 저승의 강을 배회(徘徊)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고귀한 투쟁과 죽음으로 얻어낸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저 우리의 공염불 (空念佛) 속에만 자리하는 듯하다.

얼마 전 전북 정읍의 고등학생 1천여명이`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影幀)과 촛불을 들고 질서 있게 거리를 행진하여 화제가 되었다. “세월호 인양하라!” “시행령 폐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의 의지를 발현했다고 한다. 4·19 혁명정신이 아직도 이 나라 어린 영혼들에게 살아있음을 입증(立證)한 것이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나이 먹은 인간으로 한편 미안한 마음이고, 다른 한편 고마움을 느낀다.

`진달래`의 이영도 시인이 살아있다면 반가운 얼굴로 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기막힌 사월의 향훈(香薰)이 언젠가 이 땅에 차고 넘치는 축복(祝福)으로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4·19혁명은 오늘도 시퍼렇게 우리 곁에 살아있다. 시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