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작가·계간문학지 ASIA 발행인
▲ 이대환 작가·계간문학지 ASIA 발행인

1973년 7월 3일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큼직한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포항종합제철준공`을 경축하는 것이었다. 일제식민지 배상금 일부를 들여서 연산 조강 103만t에 불과한 `포철 1기`를 준공했지만, 그날은 온 나라가 들썩인 경축일이었다. 모든 언론이 이구동성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라 했다. 그 41주년을 맞은 2014년 7월 나는 조선일보의 프리미엄조선에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 연재를 시작했다. 매주 2회쯤 실어서 70회를 넘었으니 `포철 준공` 42주년 즈음에 연재를 마치면서 책으로 나올 것 같다.

그 글을 왜 쓰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궁금해 한다. 나는 개인적인 소박한 이유와 시대적인 중요한 이유를 품고 있다.

박태준, 철의 사나이는 2011년 12월 13일 흙으로 돌아갔다. 1997년 5월 나는 포항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나날이 인연이 깊어졌다. 그가 타계한 날까지 15년 동안 거의 매주 한두 번씩 깊은 대화를 나눴다. 산술적 평균으로는 그보다 더 잦았을 것이다. 혼자서 걸을 때나 가슴을 펼치는 술자리에서 나는 김소월의 시 `산(山)`을 곧잘 노래로 부른다.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 년 정분을 못 잊겠네.> 이제 박태준은 내 영혼을 현(絃)처럼 떨게 하는 그 언령(言靈)에도 존재하고 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지키는 자의 즐거움이다. 고인(故人)과 약속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2011년 한가위 무렵이었다. 그때 박태준은 기침에 시달리며 생의 마지막 계절을 소일하고 있었다. “내가 만났던 박통 얘기도 우리가 참 많이 했는데, 이 선생은 정리해볼 수 있겠소?” 이렇게 묻는 노인의 목소리와 눈빛은 강요든 청유든 그런 낌새조차 묻지 않은 것이었다. 안 받아도 좋고 받아도 좋다는, 그저 툭 던지는 화법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찰나적으로 예리하게 번뜩이는 무엇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나는 냉큼 알아차렸다. `박정희`란 이름만 내놔도 삿대질부터 해대는 세력이 만만찮은 세태인데 앞날이 창창한 작가로서 `박태준이 만난 박정희`를 쓸 수 있겠느냐, 이것이었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어 대답했다.

“어떤 가치를 옹호할 것인가, 이 기준의 문제입니다. 옹호할 가치를 개인의 명예 관리보다 하위에 두는 것이 정치계도 아니고 연예계도 아닌 한국 지식사회의 부끄러운 실정입니다만, 작가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저는 주장해 왔습니다.”

이래서 내 삶에 새로운 약속이 성립됐다. 그 글을 쓰는 것에는 그 약속을 실천하는 개인적인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시대적인 이유가 있다.

역사의 법정은 지도자를 늘 피고석에 앉힌다. 방청석의 작가는 최후 변론과 최후 판결이 나온 뒤에도 그의 내면과 인간적인 또 다른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글은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살피고 따지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가 먼 험로(險路)를 걸어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발자취처럼 남겨둔, 흥미롭고 아름다운 `박정희와 박태준의 완전한 신뢰의 인간관계`를 사실 그대로 포착한 실록(實錄)이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을 연재하는 `작가의 말`에는 “진정한 신뢰로 위대한 일을 창조한 `롤 모델`이 우리 권력동네엔 없는가? `박정희와 박태준`이 답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작가정신이 반드시 옹호해야 하는 그 귀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나는 옹호한다. 포철이고 포항이니 그 가치를 어느 누구보다 먼저 포스코 임직원들, 포항시장과 공무원들, 포항의 오피니언 리더들, 포항의 청소년들이 깊이 헤아리게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우리는 중국 고사(故事)에서 유래한 사자성어에 익숙하다. 아득한 미래의 어느 날부터 박정희와 박태준이 신뢰에 대한 한국 고사의 단골로 불려나오며 `쌍박일심(雙朴一心)`같은 사자성어로 거듭날지 모른다. 이것이 그 글을 쓰고 책으로 세상에 내려는 궁극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