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2월 8일 오전 6시 40분 몰려드는 한기(寒氣)와 뒤숭숭한 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실내온도는 21도! 허공에 나가 있는 팔이 차갑게 느껴진다. 성에가 끼어 뿌연 창밖으로 이르쿠츠크 시내 모퉁이가 조금 보인다. 얼마만의 성에인가! 생각은 불현듯 파스테르나크 원작의 `지바고 의사`로 달려 나간다.

내전(內戰)의 모스크바를 버리고 우랄의 유리아친으로 옮아간 지바고가 새벽에 유리창에 맺힌 성에를 긁던 장면이 선하다. 라라의 이름을 그리듯 정성껏 써내려가는 의사이자 시인인 지바고. 새벽녘 잠에서 깨어난 그가 맞이하는 늑대 울음소리와 한겨울의 냉기! 혁명(革命)과 아무 관계도 없을 듯 보이는 유리아친. 하지만 지식인은 어디를 가도 시대와 역사(歷史)와 관계(關係)에서 한 발짝도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주의 10월 혁명에 열광(熱狂)하지만 혁명이 가져온 범용(凡庸)함으로 등을 돌리는 지바고. 하지만 그는 반혁명분자가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식과 시인의 영혼을 가진 사회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동란(動亂)의 시대를 살아간 시인이자 지식인이었다. 그의 복잡다단한 흉중(胸中)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랑영화로 변용한 데이비드 린!

우리는 오전 10시 15분 승합차로 델타호텔을 출발한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4시간 반 정도면 알혼 섬에 도착할 수 있다고 운전기사는 말한다.

2시 50분부터 승합차는 얼어붙은 바이칼 위를 질주(疾走)한다. 평균 50센티미터 이상 단단하게 얼어붙은 바이칼은 맑고 푸르렀다. 3시 반쯤 바이칼을 건너 다시 육지를 달리는 승합차. 우리가 부랴트인 아줌마 올가의 민박숙소(民泊宿所)에 도착한 최종시각은 오후 4시 반 무렵이다.

올가가 준비한 간편식으로 배를 채우고 우리는 알혼 섬의 대표적인 명소(名所)인 부르한 바위를 찾아 나선다.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제사(祭祀)를 모신다고 전하는 부르한 바위. 바위는 밑동부터 꽁꽁 얼어붙어 있다. 하기야 어디 부르한 바위뿐이랴! 어디를 둘러보아도 꽝꽝 얼어붙은 바이칼의 내장(內臟)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이윽고 찾아온 일몰(日沒)은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자연을 실감(實感)하게 한다. 일찍이 노자는 `천지불인`과 `성인불인`을 말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모범인 자연의 섭리(攝理)를 `불인(不仁)`하다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편벽 고루함이 없는 보편적 존재로서 자연의 속성을 일컫는다. 그러하되 손가락 마디마디에 전해지는 통점(痛點)과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는 한기는 필설(筆舌)로 형언(形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간이 경험하는 시공간과 인과율(因果律)마저 망각(忘却)케 하는 바이칼의 원시적인 자연력은 놀라웠다.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온몸을 웅크리게 하는 바이칼의 압도적(壓倒的)인 추위는 체감(體感)한 자들만의 몫으로 남는 듯하다. 바이칼의 위용(威容)과 거룩함은 나의 내면까지 얼어붙도록 한다. 동행한 이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하며 무연(無緣)하게 바람과 얼음과 하늘을 마주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언젠가 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天池)의 위용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적이 있었다. 2004년 8월 초의 일로 기억한다. 천지에서 나는 작은 인간이자 미미(微微)한 존재로 스스로를 각인(刻印)했다.

한여름 비바람 속에서 30분도 안 되는 짧은 동안 자연의 거대한 운무(雲霧)의 장막을 열어주었던 천지. 천지의 시퍼런 물 앞에 그저 압도되었던 미숙한 인간임을 자인(自認)해야 했다. 그런 느낌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

천지는 너무나 먼 곳에서 나를 압도했다. 바이칼은 내 발 아래 있으면서도 나를 억압한다.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으되, 그 압도적인 면모(面貌)에서 차이는 없다. 한여름의 천지와 한겨울의 바이칼은 많이 다른 듯 보이지만 어쩌면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우주의 먼지 같은 지구의 미소(微小)한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의 허명(虛名)과 희언(戱言)과 어설픔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그들은 동료(同僚)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늘을 우러른다. 뭇별이 투명한 대기를 뚫고 저무는 달과 이야기하고 있다. 영하 30도로 치달리는 냉기를 느끼며 마지막 일정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