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2월 5일 아침 8시 무렵 눈이 떠진다. 창밖엔 여전히 끝도 없이 펼쳐지는 설원이 이어진다. 봄이 오면 저 많은 눈이 녹아내려 강을 범람(氾濫)시킬 것이다. 지금은 물론 그런 기미가 일체 보이지 않는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의 강과 평원이 범람하는 시기는 5월이다. 한겨울 내내 내린 눈이 대대적으로 녹으면서 `눈석임`시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해빙(解氷)이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눈석임이라는 말이 생소한 독자도 계실 터.

학부시절 은사(恩師)는 `해빙기`라는 말보다 `눈석임`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강조하시곤 했다. 해빙은 얼음이 녹는 것이며, 언제든 결빙(結氷)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눈석임은 지난해에 내린 눈이 총체적으로 녹아내리는 현상이기 때문에 훨씬 적절하다는 것이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시작됐던 1956년을 두고 이른바 `해빙기`라는 표현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눈석임 시기`로 배웠더랬다.

각설하고, 오전 9시에 열차는 벨로고로스크 역에서 30분 정차한다. 할머니들이 여기저기 나와 삶은 달걀과 빵, 과일을 팔고 계신다. 달걀 세 알을 100루블 (한화 1천700원 정도) 주고 산다. 오후부터 창밖으로 설편(雪片)이 살살 나부끼기 시작한다. 15분 정도 정차한 마그다가치 정거장에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간 철로를 보며 상념에 젖는다. “길이란 무엇인가?!”

길은 두 지점을 잇는 통로다. 인간이 창출한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것이 길이다. 문화나 예술, 과학기술을 포함한 문명의 소산(所産)이 길에서 길로 이어진다. 로마와 장안을 이어주었던 `비단길`을 생각해보시라! 길은 따라서 소통과 공존의 도구이며, 차이와 대립을 완화(緩和)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길은 고립되어 있는 점들의 단절(斷絶)을 극복하는 최상의 방책이다.

길을 닦는다는 것은 자체의 불완전성을 용인(容認)하고 수용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능동적인 자기혁신이다. 그것은 다양성(多樣性)의 가치를 인정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의미하며, 절대불변의 진리를 부정하고 만유(萬有)의 필연적인 변화를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도저히 극복 불가능한 숙명론(宿命論)을 거부하고 현재에 안주(安住)하지 않음으로써 불굴(不屈)의 미래가치와 가능성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행위가 길을 내는 것이다.

길을 나서서 길에서 길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복잡다단해지는 사유의 분기(分岐)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이렇듯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하염없이 상념(想念)에 젖으며 21세기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를 생각한다. 끊어져버린 경의선과 경원선을 떠올린다. 경원선으로 러시아와 연결하고, 경의선으로 중국과 이어지는 철도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하, 그 길은 얼마나 장려(壯麗)하고 장쾌(壯快)할 것인가?!

2월 6일 오후 2시 3분에 열차는 치타에 도착한다. 열차로 이동한 지 이틀이 넘게 지난 시각이다. 그 사이 배탈이 나서 적잖은 홍역을 치러야했던 터라 생기가 사그라지는 기분이다. 아무런 상비약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대학원생들의 주도면밀한 차비가 나를 구원한다. 김수영 시인이 `절망`에서 노래한 것처럼 “구원(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만 것이다.

한밤중인 10시 50분 무렵 우리는 울란우데 정거장에 이른다. 이르쿠츠크에 다다르기 전에 만나는 가장 큰 도시다. 몽고의 울란바토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울란우데. 경의선 열차를 타고 중국과 연결되면 우리는 훨씬 단축된 시간에 이르쿠츠크에 도달할 것이다. 울란우데는 바로 그 노선과 만나는 합류지점(合流地點)이다.

이제 이르쿠츠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5시 무렵이 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깨어나는 소리 들린다. 새벽 7시 무렵 우리는 마침내 바이칼 최대 도시이자 시베리아의 진주(珍珠)라 불리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이르쿠츠크는 2시간 시차가 나는 곳이다. 사흘에서 2시간 모자라는 70시간 정도 달려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자, 이제부터는 전혀 새로운 세계 바이칼과 이르쿠츠크를 맞이하는 차비를 해야 할 시각이다.

가슴 속의 기대치가 술렁거림으로 바뀌는 시공간(時空間)에 나는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