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2015년 2월4일 블라디보스토크 하늘은 청명(淸明)했다. 현지시각 오전 11시 2분 우리 일행을 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열차 안에서 보낼 3박4일의 시공간이 고개를 살짝 내밀기 시작한다. 열차는 현지시각 2월 7일 오전 7시 무렵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것이다. 대략 68시간 동안 열차로 이동하는 셈이다. 11호차 21번 좌석이 배정됐다. 4인1실로 운영되는 쿠페열차다.

우리나라에는 쿠페열차가 없다. 가장 긴 서울-부산 구간(區間)이 고속열차로 3시간도 안걸리는 판국이니 재론할 여지(餘地)도 없는 셈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같은 나라의 시차(時差)가 9시간이다. 하물며 9천288킬로미터에 이르는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구간에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 구간을 합하면 거의 1만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 아닌가. 따라서 침대가 딸린 쿠페열차는 장거리 탑승객에게는 필수품목이다.

오후 1시에 열차는 우수리스크 역에 정차(停車)했다. 횡단열차 안에서는 장소 불문(不問)하고 원칙적으로 금연이다. 흡연자들은 바깥 상황과 무관하게 밖으로 나갔다 오는 수고를 마다할 수 없다. 횡단열차 안에는 정거장 도착시각과 정차시간이 모스크바 표준시로 기록된 문건(文件)이 비치되어 있다. 문제는 시차계산을 온전하게 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러시아 승무원들에게는 그다지 번거로운 일도 아닌 듯 보였다.

저녁 7시 무렵이 되자 일몰이 시작돼 창밖 정경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칠흑(漆黑) 같은 밤에도 시베리아의 명물 자작나무는 하얗게 빛나고 있다. `자유부인`의 정비석이 `산정무한`에서 찬탄(讚嘆)했던`숲속의 공주` 자작나무가 끝없이 줄지어 있는 철로 주변풍광은 장관이다. 최고시속 160킬로미터지만 열차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질주한다. 더러 지나치는 열차의 경적과 굉음(轟音)이 밤하늘의 정적(靜寂)과 평온을 깨뜨리곤 한다.

열차 안에서 나는 노자가 말한 `곡즉전(曲則全)`을 생각하며 성찰한다. “굽으면 온전하다!”는 의미를 가진 `곡즉전`은 매양 올곧게만 살고자 했던 어리석은 나를 매섭게 추궁한다. 누군가 곧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은 잘나고 유식한 자들만이 아니라, 못나고 모르는 사람들도 어울려 살아가는 거대한 용광로 같은 것이다. 잘난척 해봐야 얼마나 잘났을 것이며, 안다고 해봐야 얼마나 알 것인가?!

12시간을 달리고 난 밤 11시 무렵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다. 1858년부터 러시아인들이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도시의 정제(精製)되지 않은 매캐한 석탄연기가 코를 찔러온다. 30분 정차시간을 이용해 역 주변에 나가본다. `하바로프스크`라는 이름을 가지게 한 카자크 탐험대장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동상이 역 광장에 우뚝하다. 말갈, 숙신, 읍루, 물길 같은 퉁구스 계통의 종족(種族)을 억누르고 러시아의 영토 확장에 진력했던 카자크 대장 하바로프.

밤 11시 38분 열차는 다시 포효(咆哮)한다. 창밖에는 만월에 가까운 보름달이 환하고, 그 위에 작지만 또렷한 얼굴의 별이 동행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각 아닌가. 그럼에도 오랜 시간이 흘러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소회(所懷)일까, 생각한다. 반도의 수려한 풍광과 오밀조밀함 그리고 지근거리에 익숙해진 조바심 같은 대목이 나에게만 고유한 원형질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자라지만, 동시에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중국인들의 `만만디`나 러시아인들의 느긋함과 기다림은 천성이라기보다 후천적인 자질(資質)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저런 상념(想念)과 미열(微熱) 같은 설렘으로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얕은 선잠이 찾아들 뿐 숙면(熟眠)은 찾아오지 않는다. 하기야 이런 장쾌한 여정에서 코를 골고 잠이 든다면 그는 신선이거나 태무심한 인간일 터! 앞으로 이틀 밤을 더 열차에서 보내야 한다. 그 여정을 생각하며 창밖 보름달과 잠시 작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