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신조어들이 많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변화가 심하다는 뜻이다. 신조어들만 봐도 그 사회의 변화 방향, 사회 이슈를 알 수 있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자), 청년실신(청년실업이 심하다 보니 학자금 대출도 못 갚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한다) 등을 통해 불안한 청년 고용시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반퇴(半退·은퇴 이후에도 또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경우가 많아 온전한 은퇴가 아닌 반만 은퇴했다는 뜻)라는 말이 경제 용어처럼 쓰이고 있는데, 이 또한 우리나라 경제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는 관피아(관료+마피아), 정피아(정치+마피아), 교피아(교육 관료+마피아) 등 마피아가 사회의 모든 곳에 접미사처럼 붙었다. 이들은 그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 부정과 비리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관피아 방지법(공직자 윤리법) 등 나름대로 제도적 개선책이 마련되고 있으나 실효성 면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관피아와 교피아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

가장 최근에는 `갑질`, `슈퍼 갑질` 등 이 사회가 약육강식의 밀림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들이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있다. 민주주의니 평등사회니 하는 말들은 분명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언론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밀림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론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국민들은 장그래를 통해 배웠다.

필자는 `웃프다`는 말을 듣고 우리 사회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싶어 큰 탄성을 질렀다. `웃프다`는 `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이다. 웃기는데 슬픈 경우는 과연 어떤 경우일까. 멀리서 예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땅콩 비행기와 백화점 사건을 통해 보았다. 그리고 가장 최근 국회를 통해 `웃프다`의 의미를 확실히 알았다. 정말 한동안 국민들은 청문회라는 것을 보면서 웃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큰 슬픔을 느꼈다. 창과 방패, 반대를 위한 반대, 나만 아니면 돼, 신상 털기, 이전투구(泥田鬪狗) 등 국민의 힘을 모조리 빼놓은 블랙 코미디, 이보다 더 웃픈 것이 어디 있을까. 누군가가 말했다. “이 나라에서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생아뿐이다”라고. 정말 웃프다.

`웃다`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기쁘거나 만족스럽거나 우스울 때 얼굴을 활짝 펴거나 소리를 내다`, `같잖게 여기어 경멸하다` 분명 지금 우리 주변에 누군가가 웃고 있다면 그 웃음의 의미는 전자가 아닌 후자일 것이다. 국민을 바보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웃음. 그 웃음이 더 이상 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위정자들은 지금 국민들이 웃고 있는 웃음의 의미를 알기나 할까.

허탈함을 넘어, 허무하기까지 한 웃음은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다. 국민들이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은 언제 올지? 민족 최대 명절 설이라고 하지만 국민들의 표정은 그 어느 해보다 어둡다, 아니 슬프다. 누가 이들을 이토록 슬프게 만들었는가.

아직 잔인했던 말의 해인 2014년이 끝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말 많은 사회에서 언제나 문제는 말인데, 그 말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국민들은 빨리 말이 가고 행복 가득한 양이 오기를 간전히 기다리고 있다. 말 많은 사회가 아닌, 진정 국민을 행복하게 할 양 많은 사회가 하루빨리 오길 기원한다. 그런데 왜 김영랑 시인의 시가 입속에서 떠나지 않는지.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부디 올 봄만큼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찬행봄`(찬란한 행복의 봄)이라는 신조어를 기다리며, 국민 여러분 복 많이 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