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석수 구미종합사회복지관장·신부

말의 홍수시대, 온갖 뉴스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말의 온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권한을 지나치게 행사한 그녀의 말투와 행동은 한 기업의 리더라는 것을 의심케 한다. 또 한 젊은 청년이 경찰서에서 한 행동은 투자실력에 비해 너무나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돈이나 자리에 바탕을 둔 행위가 아니라 따뜻한 인성에서 출발한 결과를 상상해 본다.

`2030 대담한 미래`에서 최윤식씨는 미래 산업에서 승리하기 위한 3가지 능력을 이야기 하고 있다. 경제(돈)나 신기술보다 첫째로 꼽은 것은 인문학적 능력이다. 인문학은 단순한 교양차원을 넘어 사람의 정신과 사람을 연결하는 지식이다. 이 지식을 활용하여 통찰력과 상상력과 연결력의 능력을 기르게 된다. 많은 전문가들은 미래 인재의 필수 조건으로 통찰력과 상상력이라고 한다.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으로 변화의 흐름을 잡아내는 능력을 기르고, 상상력으로 새로운 미래를 창출해 사람들의 흐름을 변화시킨다면 멋질 것이다. 나아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 가상과 현실의 교차적인 연결을 통하여 기술적 발전만이 아니라 인간적 사랑의 흐름이 증폭되는 세상, 꿈이 아니기를 바란다.

미래의 변화를 만드는 7가지 힘 가운데 하나로 윤리성을 언급하고 있다. 갖가지 위험은 비윤리적 행위, 비정상적인 상황, 부패와 부정에 있다. 소비자는 냉정한 선택으로 윤리적 차원에서 문제 있는 기업의 활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땅콩회항이라는 사건을 통해 볼 때, 불매운동과 예약율의 저조는 그 단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고 기업의 가치와 서비스의 부가가치마저 곤두박질 할 수 있다.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듯이 공간의 여백도 잃어가고 있다. 서울역에서 손님이 쉴 수 있던 공간은 어느새 상점으로 변화가 되어 있었고 중앙 부분 역시 물건을 파는 곳으로 변화돼 시선은 막혔다. 물질적 차원에로 닫힌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다. 그래서 일까 너와 나의 맞잡은 연대성보다 갑과 을의 횡포가 여전히 2013년에 이어 여전히 2014년 연말에도 뉴스로 장식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어둠, 개인적 질곡을 뚫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빛, 그분이 내려오기를 간절히 기다려진다. 한국천주교주교위원회 자선주일 담화문에서 관심과 연대를 국가나 정부의 몫으로 한정지을 수 없기에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보잘것없는 나눔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마는 마더 데레사의 정신으로 크기나 숫자로 따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2014년 3인 가구 월수입 132만원에 미치지 못하는 410만명으로 추산되는 현실에서 주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희생이 따르지 않는 아픔이 없는 자선은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사회적 연대를 이루기 위한 기본적 자세를 알려준다. 호주의 전 총리 밥 호크는 “가장 중요한 일이 언제나 가장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요란스럽게 사랑의 연대의 대열에 동참하라고 나를 호출하기보다 스쳐지나가는 미풍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지역사회의 기업과 많은 단체에서 김장을 나누어 사랑의 온기를 나눈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김치는 다양한 재료를 하나의 맛으로 배치시킨 하이브리드 패치워크 가운데 교배형 패치워크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제각각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새로운 조직으로 승화된다면 새로움은 배가될 것이다.

볼테르는 “사람을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판단하라”고 했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진중한 질문은 지혜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했다. 질문을 통하여 학습의 효과가 최대 150퍼센트까지 향상된다는 연구가 있다. 좁은 기내에서 일하는 승무원에게 따뜻한 말을 전하며 질문을 하였더라면. 자신이 가진 재산으로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들에게 질문을 하였다면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텐데. 하느님께서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질문을 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도 같은 질문을 하셨다. 예리고에서 눈 먼 이를 만나시어“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