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마실

▲ 월송정 가는 길.
▲ 월송정 가는 길.

계절을 느낄 수 없는 동해, 해안도로를 따라 넘실 넘어가 본다. 휘드린 내 운명을 틀고 틀어서 바다에 잠재운다. 속이 후련해진다. 파도는 사탕 발린 유혹처럼 거침없이 끌어당긴다. 못 이긴 체 알몸으로 서서 가을의 허기를 채워 볼까나.

어느 가을, 월송정 앞바다에서 연인이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십 원짜리 동전 한 개가 남자 눈에 띄었다. 둘은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네 잎 클로버를 찾듯 모래를 뒤적이다 몇 개 더 주워 가슴에 넣었다. 동전엔 샤머니즘의 흔적이 거무튀튀하게 남아 있었다. 아마도 용신에게 바친 동전이었나 보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파도에 쓸려온 것들이 많았다. 모래 틈에서 뭔가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터지지 않은 총알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변심 하면 그 총알로 자신의 심장을 쏠 거라며 마음을 털어놓았다. 시계추가 멈춰 버린, 총알을 주웠던 그 자리에 붉은 꽃 한 송이 피고 졌다. 이 사실을 아는 이 없다.

“피할 수 없는, 피해갈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오래전에도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차마 떠나지 못해 여기 남아 있을 것이거늘.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오직 너는 나의 너였거늘.” 네가 나를 떠나보냈어도 나는 너를 떠나보내지 않았으니 이별이란 본래 없는 게 아닌가.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마실에 아름다운 솔숲과 정자가 있다. 매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 들고 솔숲을 걷는다. 혼자 나선 여행길이 외로울 때가 있다. 심리적 허기를 달래면서 부지런히 과자를 입으로 밀어 넣는다. 앞서 가던 꼬마가 엄마 손을 뿌리치고 쪼르르 달려가 길섶의 풀을 뽑는다. 소꿉장난이라도 하려는 걸까. 궁금함에 뒤를 연신 돌아다 봤다. 아이의 등 뒤로 맑은 햇살이 친구 하자고 내려앉는다.

월송정에 올라보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세상 시름 다 내려놓고 양반놀음이나 해볼까나. 풍광이 좋은 곳에는 어디든지 정자가 있다. 민초들은 풀뿌리로 연명해도 양반들은 민초들의 혈세를 빨아 명당 터에 정자 짓고 풍류나 일삼았다. 그들은 민초들과 아픔을 나눈다며 철썩 같이 약속하고도 부정부패의 선두에서 호의호식했다. 비리로 일관된 삶이 드러나도 기억이 안 난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탈세는 또한 그들이 앞장서서 저질렀다. 죽어나는 것은 손바닥 보듯 빤한 살림의 민초들이다. 오죽하면 돈 주고 양반 문서를 살까. 외빈내화(外貧內華)의 탈을 쓰고 산 양반들, 그 양반들이 남겨둔 풍류 처는 이리도 아름다운가. 신선놀음하던 곳에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간성의 청간정, 강릉의 경포대, 고성의 삼일포, 삼척의 죽서루, 양양의 낙산사, 울진의 망양정, 통천의 총석정과 평해의 월송정이 관동팔경이다. 조선 성종이 당시 이름 있는 화가를 시켜 “팔도를 돌아다니며 활쏘기 좋은 정자를 그려오라.” 명했다. 화공은 영흥의 용흥각과 평해의 월송정을 그려 올렸다. 성종은 “용흥각의 부용과 양류가 아름답기는 하나 월송정에 비할 수 없다”며 월송정과 그 주변의 경치에 감탄했다 한다. 용흥각이 어디인지 검색을 해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월송정은 고려 시대 왜구의 침략을 살피던 망루였다. 조선 중기에 박원종이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망루를 정자로 세우게 됐다. 이후 월송정은 관동팔경의 반열에 들면서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동유기`에? 의하면 평해 군청에서 5리 되는 곳에 이르면 일만 주의 소나무 속 정자를 월송이라 하고 이 월송에 사선(四仙)이 놀고 지나갔다 하여 그 이름이 연유되었다 한다. 달밤에 송림 속에서 놀았다 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고 했고, 월국(越國)에서 송묘(松苗)를 가져다 심었다 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고도 했으나, 전해오는 각종 자료에 의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 불리고 있다. 달밤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교교한 달빛과 일체가 되다 보면 저절로 시인이 되리라.

퇴락한 것을 1933년에 이 고을 사람 황만영, 전자문 등이 재차 중건하였고 일제 말기에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철거되어 터만 남아 있었다. 그 후 1969년에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의 후원으로 2층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졌으나 원래의 모습과 달라 해체했다가 1980년에 현재와 같이 다시 세웠다. 이 정자는 사선이라고 불린 신라 시대 영랑, 술랑, 남석, 안상, 네 화랑이 경주를 떠나 전국을 주유하며 심신을 달랜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소나무 숲에 와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밤이면 달빛을 즐겼다. 화랑으로서 웅지를 품던 도장이 아니었을까. 많은 소나무와 십 리가 넘는 명사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송강 정철도 유람하다 이 곳에 들러 읊은 시에서 “소나무 뿌리를 베고 잠들었다가 꿈속에 신선을 만나 술 얻어 마시고 놀았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김근혜<br /><br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월송정을 나오면서 입구에서 만난 소나무 숲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누리상을 수상한 곳이라고 한다. 평해 황 씨 종중 숲인데 20m도 더 되는 늘씬한 소나무들이 천여 그루나 있다. 신선한 공기가 찌든 영혼을 말갛게 한다.

평해 황 씨 시조단도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아름다운 정원이 소왕국 같다. 울진이 낳은 애국지사 황만영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황 씨 시조 단 앞에 건립한 기념비가 있어 잠시 걸음을 멈췄다. 황만영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차장에 내정되었던 독립 운동가이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 중인 연인이 황 씨 시조단 정원에서 사진을 부탁한다.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어디서 만났었던 것 같은 그 장면, 몇 컷을 눌러주고 내 카메라에도 슬쩍 담아 본다.

사랑하라, 오늘만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