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누가 끌지 않아도 달려만 가고 싶은 길, 가을 들녘이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곳에서부터 높고 부유한 곳까지 내 애마는 말없이 동행한다. 행장을 꾸리지 않고 가다가 지치면 아무 곳에나 애마를 세워두고 휴식을 취한다. 이게 내가 여행을 즐기는 법이다. 특히 가을은 빈 몸으로 느껴보고 싶은 계절이라 더 가볍게 떠난다.

문학 하는 동료의 집으로 여럿이 소풍을 갔다. 농수로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별마루 정자에 드러누워 본다. 한숨 자고 나면 모든 피로가 풀릴 것 같다. 어느 왕가의 별장보다 부러울 게 없다. 떡순이가 으르렁거리며 낯선 객을 대한다.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민한가 보다. 어미 개는 연신 새끼를 핥고 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새끼 사랑이다. 동료들은 아이들과 도토리를 줍고 한쪽에서는 표고버섯을 따느라 배고픔도 잊었다. 도심에서 맛보지 못한 농촌 체험에 연신 웃음꽃이다.

동료는 꼬마 손님에게 줄 고구마를 굽기 위해 가을볕보다 따가운 군불을 지핀다. 장작더미 안에서 타닥타닥 고구마 익어가는 소리가 난다. 뜨거운 불길이 고구마를 휩싼다. 동료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가슴에서 꺼져가던 불씨가 동료의 뜨거운 정(情)에 다시 살아나는 오후이다.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 넓은 마당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미꾸라지 튀김에 곁들어 먹는 복분자 술 한 잔은 수라상보다 더 푸짐하다. 오붓하게 느껴보는 가을 향연이다.

어쩌려고 그러는지 집 주인은 귀한 프로폴리스까지 주려 한다.“ 요렇게 그저 퍼주면 어찌 산데요.” “지천에 늘린 것이 다 거둘 것이고 머걸 것인데 무신 걱정이요.” 동료의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에 저절로 고개 숙여지는 시간. 입속에 혀만 살아 있는 사람을 보다가 가슴에 등불 안고 사는 사람을 만나 훈훈하다. 산 그림자가 지붕에 살짝 내려앉았다. 가을의 짧은 해를 아쉬워하며 일행은 목적지로 향했다.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관평 마실이다. “기계란 어감이 왠지 공장이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포항과도 잘 어울리고….” “언제던가, 이 마실 태생의 시인이 쓴 신문인가 책인가에서 봤는데요. 기계는 형산강의 지류인 기계천 주변에 옛날부터 구기자가 많이 자란다 해서 구기자 기(杞)자와 시내 계(溪)자를 써서 `기계`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글고 봉계리는 봉좌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의 중간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랍디다. 봉계리는 관평이라고도 부른다네요.” “기계라 쓰지 말고 구기자 면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순우리말로 좋지 않나요.”

고려 말 경주 부윤으로 있던 태사의 후손이 이곳에 관청을 설치하고 분실된 태사의 묘를 찾았다 하여 관평(官坪)이라 불렀으며, 물 대기 좋은 들이라 하여 관평(灌坪)이라고도 한다. 관평은 고려의 개국 공신인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 장군의 묘가 있어 후손들이 관청을 설치하고 관평(官坪)이라 했다는 여러 설이 전해진다.

우리 일행은 파평 윤씨 시조인 윤신달을 모시는 봉강재로 향했다. 봉강재는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201호이며 1752년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태사공 윤신달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이다.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추향제가 열리며 전국에서 사, 500 명의 후손이 운집한다.

▲ 파평 윤씨 시조 묘가 있는 봉강재.
▲ 파평 윤씨 시조 묘가 있는 봉강재.
`조선씨족 통보`와 `용연보감`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연못 가운데에 있던 옥함(玉函) 속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의 파주군 파주면 파평산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에 옥함 하나가 떠 있는 것을 근처에 살던 한 노파가 발견하고 열어 보았다. 오색 찬연한 깃털에 쌓인 한 옥동자가 들어 있어서 자세히 보니 두 어깨에는 일월 모양의 붉은 사마귀가 나 있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여든 한 개의 비늘이 돋아 있었다. 발바닥에는 북두칠성 형상의 일곱 개로 된 점이 있고, 손금의 형상은 尹자와 같았으므로 성을 윤씨로 정하였다. 용연에서 나온 옥동자가 장성하여 윤신달이 되었다는 재미있는 설화이다.

그는 왕건의 막료가 되어 고려의 건국 및 후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을 세웠다. 삼국통일 후에 벽상삼한익찬공신의 서훈과 삼중대광 및 태사의 관직을 받았다. 파평 윤씨 가문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 시조인 윤신달이 연못의 옥함에서 나왔을 때 여든 한 개의 비늘이 나 있어서 잉어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5세손인 윤관이 함흥 전투 중에 거란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때 잉어의 도움으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설이 있어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시조 설화를 보면 대부분이 난생설화가 많은데 잉어는 특이하네요. 하하, 상상력에서는 선조들이 한 수 위인 것 같아요.” “시조 설화는 거의가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영웅이 많잖아요. 그리고 고난을 겪고 위기를 극복한다는 공통점이 있구요. 우리나라 민족성을 닮았지 않나요. 선조들은 설화를 통해서도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아요” “시조 신화에서 느껴지는 것은 우리나라가 가계나 혈통을 중요시했다는 것도 알 수 있네요. 허구인줄 알면서도 전통을 지키고 있는 민족성도 대단하지요.” 이 마실에 흐르는 설화에서 우리 민족은 족보를 귀중하게 여기고 문중을 중시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분홍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코스모스가 손을 흔든다. 내 인생 화폭에 동료들의 사랑을 담았다. 함께 해서 더 풍성한 가을 소풍이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과 이리 부딪히고 저리 보듬으며 손잡고 가는 것이 아닐까. 마음 붙일 곳이 하나 더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