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을 가다 예천군 용문 마실

▲ 조선시대 전통 생활 문화의 숨결이 살아 있는 금당실 마실.
▲ 조선시대 전통 생활 문화의 숨결이 살아 있는 금당실 마실.

추수를 앞둔 벼들이 황금들판을 이루었다. 여물지 못한 인격도 가을엔 농부의 마음이 된다. 서로의 일상을 염려하고 안부를 물어주는 지인과 만나 옛길을 걸어본다. 처음 보는 남정네를 만날 때처럼 가슴이 뛴다. 우정도 곰삭아야 맛이 깊은가 보다.

돌담 너머로 초가집이 보인다. “엄마” 부르면 금방이라도 버선발로 달려 나와 덥석 안아줄 것만 같다. 굴뚝에선 연기가 몽개몽개 솟아오른다.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 나오던 동생의 입이 까맣다. 아마도 구운 감자를 까먹었나 보다. 그 꼴이 우스워 깔깔거렸었는데 지금은 별이 되었다. 갑자기 그 아이가 보고 싶다.

할머니 한 분이 호박을 따 담고 있다. 늙은 호박과 애호박이 섞여 있다. “호박으로 뭐하시게요” “늙은 호박은 나돗따가 호박범벅 해먹을라꼬. 양대콩 놓고 찹쌀가루 풀어 써노만 우리 영감이 억시기 좋아하니더. 겨울밤이 길자니껴. 주전부리 업슬 때 속을 파내 전을 부쳐 머도 마신니더. 애호박은 풋고추 썰어 넣고 전에다 막걸리 한잔하면 죽이니더. 이런 낙기라도 있어야 살제, 어째 사니껴. 젊은 아지매들은 그런데 어데서 왔니껴. 호박 한디 주만 가주가실라이껴.” 인정 넘치는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를 뒤로 하고 마실을 둘러본다. 전 냄새가 폴폴 나는 것 같아 침이 꿀꺽 넘어간다.

경상북도는 예향의 고장이라 유교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고택이 많다. 용문면은 예천 서북단의 소백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을 지켜낸 고택은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그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 준다. `금당고` 혹은 `금곡`으로도 불리는 금당실 전통 마실은 감천 문씨가 개척했고 그의 사위 박종인과 변응영이 정착한 곳이다. 정감록에는 이곳을 천재나 전쟁에도 마음 놓고 살수 있다는 십승지의 한 곳으로 지목했다. 지형지세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옆으로는 작은 개천이 흐르는 연화정수형으로 연못 속에 핀 연꽃과 같다 해서 `금당실`이라 불렀다. 병화와 질병, 기근이 없다고 하니 여기서 목마른 삶을 축여도 좋겠다.

이 마실은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다 큰 내(川)가 없어 무산되었다. 조선시대, 명문 권세가들이 이곳에 거주함으로써 벼슬아치들이 많이 찾았는데 유교와 양반 문화가 번성해 흡사 서울 같았다고 한다. 금당실과 맛질 마실은 서로 이웃해 있으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경상도의 대표적인 양반 마실이다. `금당맛질 반서울`로 불리며 충효 정신과 자연 환경이 아름답다. 한 때는 오일장이 개최될 정도로 중심지이기도 했다. 벼농사 외에 양봉, 양파, 마늘, 고추, 상황버섯, 농, 특산물도 생산 판매하고 있다.

금당실 마실은 조선시대 옛 가옥과 돌담길이 무려 7km나 된다. 미로 같은 길을 걸으며 쉼표 하나씩을 콕콕 찍어 본다.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닿았다. 순간 어디로 가야할지 지인과 나는 멀뚱히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돌아서 왔던 길로 가다보니 또 다른 길이 나온다. 인생길도 이러하지 않던가. 막힌 것 같으나 뚫려 있고 없는 것처럼 보이나 어딘가에는 길이 있어 가던 걸음을 가지 않던가. 원래 가고 있던 길보다 더 좋던 나쁘던 출구를 발견한 기쁨에 감사하고 주저앉지 않아서 다행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다른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방풍림이라 할 수 있는 `쑤`라고 불리는 마을 숲은 800m 가량 되는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으로 금당실 마실의 자랑거리이다. 금당실 송림은 수해 방지와 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 숲은 구한 말 혼란을 겪는다. 1863년 동학을 전파하던 최제우가 처형되는 과정에서 민심이 동요되어 큰 나무들이 일부 벌채되었다. 이어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노비 구출 비용 마련을 위해 또 나무가 벌채를 당하자 1895년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금당실에 99칸의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 숲을 보호하여 왔다고 한다.

이 마실 주변엔 볼거리가 많다. 드라마 `황진이`의 무대였던 병암정이 있다. 가파른 암벽 위에 지은 병암정은 한 폭의 그림이다. 고종 때 이유인이 금당실로 낙향하여 살면서 병암정을 `옥소정`이라는 이름으로 건축하였다. 이유인은 구한말 중인 출신으로 고종과 명성왕후의 총애를 많이 받아 승승장구했던 인물이다. 항일 운동가이며 덕수궁을 맡았던 건축가이기도 하다. 입신출세와 재산이 많아 수많은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 예천 권씨 문중에서 옥소정을 매입해 `병암정`이라 개칭하고 권원하 선생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사용하였다.

▲ 김근혜<br /><br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금당실 마실에서 차로 십분만 가면 용문사를 만난다. 대장전을 비롯해서 팔상도, 천불도 등 보물이 9개나 있는 천년 사찰이다. 국내에는 하나밖에 없는 회전식 불경 보관대인 윤장대는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으며 보물 684호이다.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뜻을 품고 두운대사를 만나기 위해 산 입구에 도착했다. 골짜기에서 용이 나타나 태조를 맞이하여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짓고 사찰을 용문사라 했다는 전설이 흐른다.

뒤를 돌아다본다. 지인과 내가 잠시 머물렀던 용문면 마실도 역사 속으로 묻힌다. 내 인생에 찾아온 소중한 인연과 함께 해서 기쁨이 더 크다. 종자기와 백아의 지음절현의 우정은 아니더라도 서로가 내는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비우려고 떠난 여행길인데 어깨가 무겁다. 이 마실의 역사와 유산을 듬뿍 담아서 그런가 보다. 그리고 소중한 한 가지를 더 짊어졌다. 지인의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