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남구 구룡포마실

▲ 포항시 남구 구룡포의 까꾸네 모리식당. 구룡포 토속음식인 모리국수로 유명한 음식점이다.
▲ 포항시 남구 구룡포의 까꾸네 모리식당. 구룡포 토속음식인 모리국수로 유명한 음식점이다.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정겹다. 비를 맞으며 골목길을 꽉 메운 사람들이 보인다. 이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낯선 여행자들과 얘기도 나누며 달랜다. 우리 일행도 간이 의자에 앉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같다.

저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삼십여 분을 기다려도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을까. 까치발을 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허름한 탁자 네 개에 커다란 솥이 올려 져 있다. 김치하고 멸치에 고추장만 있는 소박한 밥상이다. 시장함에 침이 넘어간다.

지인은 구룡포에 오면 세 가지 음식은 꼭 먹어 봐야 한다고 했다. 구룡포 초등학교 앞에 있는 `철규 분식집의 찐빵과 단팥죽`, 그리고 `까꾸네 모리국수`라고 했다. 육지 태생이라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 때문에 지인은 노심초사한다. 안 맞으면 막걸리로 배를 채우자며 낄낄거렸다.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 차례까지 오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얼른 쫓아가서 합석 좀 하자고 했다.

오랜 기다림도 막걸리 한잔에 순해진다. 막사(막걸리에 사이다를 탄 것), 꿀막(막걸리에 꿀을 탄 것)도 구막(구룡포 막걸리)의 시큼한 맛은 따를 수 없다. 오관의 마디가 부드럽게 풀린다. 존재감 없는 인생 같이 국수가 솥째로 나왔다. 사십여 년 전의 어느 뱃사람이 앉았을 이 자리에서 나도 주린 배를 채운다. 다행히 고춧가루와 마늘로 비린내를 잡았나 보다. 해물 칼국수나 진배없다. 얼큰하고 시원하다. 사람들은 칼국수 속의 생선을 건져 올리며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 웃음을 짓는다. 좁은 식당에 함박꽃이 핀다. 솥째 나온 국수의 푸짐한 양만큼이나 행복해 보인다. 합석해도 불편해하지 않고 막걸릿잔을 건네는 인정이 있어서 좋다. 고운 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따스하다. 까꾸네 모리국수가 있는 마실 풍경이다.

`모리`란 뜻이 궁금하던 참인데 마침 주인이 다가온다. 칠순이 되어 보이는 이옥순 할머니이다. “처매는 이름도 업서서 그냥 국수라 했서요. 생선과 국수를 석가가꼬 범벅해서 옛날부터 머겄어요. 배고픈 시절이다 보이 별미였지요. 이 음식을 조아하던 분드리 이름도 업시 묵을게 아이고 오늘은 이름을 짓자, 이래 가지고 모여 안자 연탄불에 끓인 걸 드시면서 여러 사람이 모디 가지고 모다서 먹는다고 모디 국수라 카자 하던기 모디 국수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모리국수로 변했어요.”

뱃사람들이 어판장에서 팔다 남은 생선을 가져다주며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 모리국수의 시초가 되었다. 제철 생선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잔뜩 넣은 모리국수는 출출한 배를 달래주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뱃사람들의 고단함도 탁배기 한 사발과 모리국수 한 그릇이면 새 힘이 돋았을 것이다. 배고프던 시절, 조금이라도 양을 늘려서 많은 사람이 먹기 위해 만든 것이 별미가 되었다. 입소문을 타고 여행자들은 포항에 오면 통과의례라도 하듯 이곳을 거쳐서 배를 채우고 간다.

“까꾸는 또 무슨 뜻인지요” “허허 까꾸는 우리 집 막내 지집아 별명이지요. 뱃사람드리 밥무러 왔다가 어린아가 울고 있으이 까꿍 하며 어르던 것이 까꾸가 됐어요. 그담부터 사람드리 까꾸네 칼국수라 불렀지요”

고기 반 물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옥했던 동해안 최고의 어장 구룡포가 지금은 쇠락해서 인구 1만 명이 겨우 넘는 소읍이 되었다. 국수를 들고 계시던 나이 지긋하신 분도 고향이 구룡포라고 했다. “1930년 초부터 구룡포는 최고의 전성기였죠. 사람과 돈이 넘쳐났어요. 이 질거리를 짝 올라가면 양가에 꽁치, 오징어가 산더미 거치 쌓여 있었어요. 구룡포는 개까지 지폐를 물고 댕길 정도라는 말이 있었죠. 어획량이 많아 그만큼 풍족했었다는 말이죠. 그러던 거시 일제수탈의 거점지가 되었지요.”

1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어느 거리에 서 본다. 한일역사의 아픈 과거가 남아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근대 일본가옥 거리이다. 원래 마을이 없던 곳이었지만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성한 구룡포는 근대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고 있던 일본의 마실 오다 어촌, 오카야마 현의 어부들은 가난을 벗어나고자 동해 연안의 풍족한 어자원을 찾았다.

구룡포를 발견한 그들은 9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꿈꾸며 이곳에 정착했다. 주소를 가지고 있던 일본인들만 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구룡포에 본격적으로 터전을 잡은 일본 어부는 도가와 야스브로와 하시모토 젠기치였다. 이들은 구룡포를 기점으로 선어 운반업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가난한 일본인에게 새 시대, 새 삶을 열어준 그들은 구룡포 공원 올라가는 계단에 시멘트로 덧칠된 채 비(碑)로 서 있다. 여행자들은 이 공덕비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왜곡된 역사 앞에서 후대 사람들은 무엇을 배우고 교훈으로 삼을까.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하시모토 집 앞에는 느린 우체동이 있다. 큰 우체통 안에 있는 편지는 실제로 보내진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을까. 사춘기 때, 부모님 몰래 주고받던 연애편지가 생각난다. 우체부 아저씨만 기다리며 동구 밖에 나가서 서성대던 일, 지금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느린 우체통이니 언제 당도할지 모르지만 그 아이에게 안부를 전해본다.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때론 힘이 된다. 연애는 편집된 화면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