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대봉1동 마실

▲ 김광석 거리에서.
▲ 김광석 거리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김광석 노래가 귓전에 울려 퍼진다. 방천시장은 추석 전인데도 한산하다. 방앗간 열린 문틈으로 파리 몇 마리가 넘나든다. 졸음을 쫓고 있는 할머니의 고개가 무거운 오후이다.

방천시장은 경대병원역 3번 출구로 나와 수성교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있다. 일본, 만주 등지에 피해 있던 전재민들은 해방이 되자 여기에 모여들어 장사를 시작했다. 먹고 사는 방편으로 터를 잡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방천시장 남쪽 10m 지점에 죄수들의 채소밭과 벽돌 굽는 공장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은 찾을 길 없다.

방천시장은 1960년대부터 싸전과 떡 전으로 유명세를 탔다. 번성기에는 100여 개의 점포가 즐비했던 대구의 대표 재래시장 중 하나였다. 인근의 경산, 고산, 청도 사람들까지 이 시장을 이용했을 정도의 규모였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60여 개의 점포만 남아 있다. 재래시장의 침체를 가져온 건 인터넷도 한몫을 한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집으로 배달까지 되는 세상이다. 재래시장이 주는 푸근함과 인정보다 사람들은 편리함에 익숙해져 간다.

방천시장은 전통 저잣거리를 살리는 취지에서 `문전성시 프로젝트`로 김광석 거리를 조성하였다. 대구광역시와 상인, 예술가 40여 명이 참여하여 주민이 활성화하는, 주민이 후원자가 되는 문화예술 장터로 거듭났다. `우리 마을 향토자원 베스트 30선`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광석 벽화를 비롯하여 사랑의 자물쇠, 예술품 판매, 먹거리, 공연을 통해 지금은 이 거리가 문화관광명소가 되었다. 김광석 거리를 보고 추억하려는 사람들로 전국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늘었다. 주말이면 거리의 악사들이 펼치는 공연도 가족들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락서-즐겁게 글씨를 쓰다.” 황정숙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수능보다 어려운 안주 고르기”를 보니 웃음이 난다. “애써 힘내도 한숨, 또 한숨만……, 내 어깨의 무게를 잠시나마 잊을 수만 있다면…….” 삶에 지친 어느 가장의 락서 앞에 쉬어 갈 의자 하나 마련해 주고 싶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맞잡는 것이 인생살이의 풍경이 되는 곳, 락서 展에서는 가능하다. “달에 손잡이를 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기발한 생각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좋은 달을 혼자서 보고 잔다.”는 애상 어린 글귀에 눈물이 나려 한다. 늙지 않는 슬픔이 야속하다.

대문이 열려 있는 집을 기웃거리다 빨래를 널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 풍경이 낯설지 않다. “이짜서 한 오십 년은 살았제, 그때는 니꺼 내꺼 할 꺼 없이 살았으이. 가차운 이웃이 친척보다 나았제. 마신는 거 하마 콩 한쪽도 농갈라 묵고 무신 일이 생기마 저거 집일 같이 서로 도와가며 살았제. 인자 그카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집집마다 문 걸어 잠그고 살고 있어. 그 시절엔 묵을 끼 엄써도 마음만큼은 따셨는데……. 내도 인자 갈 때가 됐는 갑다. 자꾸마 오래전 일이 생각키는 거 보마.” 할머니 한숨 소리에 집은 더 나직해진다. 이집도 세 들어 사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작은 방 앞에 운동화 몇 켤레가 놓여 있다. 집을 떠나 처음으로 자취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손바닥만 한 집에 사람은 많고 화장실은 하나여서 늦잠이라도 자는 날엔 볼일조차 참고 출근해야 했었다. 공중화장실을 방불케 했던 서민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셋방살이하며 주인 눈치는 또 얼마나 살폈던가. 제때 월세를 내도 죄지은 것처럼 도둑고양이가 되어야 했었다. 연탄불이 꺼져도 불 좀 붙여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추운 방에서 오돌오돌 떤 적도 많았다. 자취생 몰래 밑불을 아궁이에 넣어준 좋은 주인도 더러 있었다. 사람 냄새에 묻혀서 독한 연탄가스도 훈훈했던 시절이었다.

추억의 문방구점에서는 달고나를 만드느라 한창이다. 국자에 설탕을 넣고 젓가락으로 잘 저은 다음 소다를 섞는다. 굳어지면 설탕 판에 부어 여러 가지 모양 틀로 찍으면 완성이다. 한 남자가 연탄불 위에 놓인 국자를 열심히 젓고 있다. 아이들은 별 모양 틀을 쥐고 신기한 듯 바라본다. 아마도 별을 만들고 싶은가 보다. 혹시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방천시장에서 만들어진 달고나가 아니었을까. 오늘 밤 하늘을 올려다봐야겠다. 새로운 별이 이사를 왔는지.

김광석은 1964년 대봉동 방천시장 번개 전업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노래하는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전설적인 가수이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이등병의 편지` 등이 있으며 2007년에 부른 `서른 즈음에`는 음악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기타 하나만 있으면 그의 노래는 어디서든 흥얼거릴 수 있는 포크송이다. 세대를 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가수는 자신이 부른 노래대로 인생살이가 되는 것 같다며 어느 콘서트장에서 그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떤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가 이 세상을 떠나 버린 후, 내 서른 몇 해의 날도 우울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노래 가사처럼 마지막 안녕이라는 인사도 남기지 못한 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거리에 서 있다. 그가 그리운 날은 방천시장으로 가보자.

안녕하지 못한 세상에서 그는 안녕한 세상으로 갔다. 락서 展에서 만난 어느 무명 글쟁이의 글귀가 발목을 잡는다. “당신의 상처는 안녕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