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환 유럽경제문화연구소장

세계 최초의 빈민 복지 시설은 1516년 야곱 푸거(Jacob Fugger)에 의해 탄생됐다. 당시 중세 유럽 상업의 중심지였던 독일의 고도(古都) 아우구스부르크에 살았던 푸거는 빈곤층을 위해 자신의 재산 일부를 기부했다. 그는 아버지 한스 푸거의 사업을 이어받아 당시 전 유럽의 상권을 장악했는데, 종교개혁의 불씨가 됐던 면죄부 판매가 마인츠의 대주교나 교황 레오 10세가 푸거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였다고 할 정도니 그 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된다.

중세 영주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서로의 이익을 위해 결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황제와 돈거래를 했던 푸거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사실상 영주 이상의 강력한 지위를 누렸다. 그런 그가 죽기 전 구빈을 위한 자선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가난한 시민을 위해 건설한 `푸게라이`라는 주택단지는 세계 최초의 사회화된 복지 주거 시설로 기록되고 있다. 푸게라이는 오늘날 아우구스부르크의 명소로 남아 많은 관광객을 맞는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입주자의 자격 요건이다. 우선 범죄 사실이 없어야 하고, 빈민 증명서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우구스부르크의 시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 봉건시대인 당시 아우구스부르크의 시민이라면 아우구스부르크라는 작은 나라의 국민인 셈이다. 작은 나라, 즉 성(城) 안에서 한 사람도 탈락해서는 안 된다는 영주나 지배층의`노블레스 오블리주`인 것이다. 성 안의 모든 사람이 건재할 때, 비로소 영주와 영역과 성(城)도 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영주나 지배층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어긋나지 않다는 의미로, 수 세대에 걸쳐 지배 계급으로 군림한 유럽의 가진 자나 지배층이 갖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책임감과 도덕심일 수도 있다.

우리 선조에게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었다. 길었던 추석연휴에 빠지지 않았던 화제중의 하나도 신드롬에 가까운 열광을 불러일으킨 영화`명량`에 관한 이야기다. 전쟁의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만이 아니라 멀리서 기도한 아낙네들까지 현장에 있었던 모든 민초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해전에 참가해 함께 싸우면서 장렬히 전사한 무명 장수와 병사들의 활약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 장수중의 한 사람이 바로 병암 권전이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권전의 묘소에 있는 비문과 `충무공전서` 등 기록에 따르면 권전은 조선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마애 권예(1495~1549)의 맏손자다. 그는 종손으로 선조 15년(1582) 무과에 급제한 뒤, 경남 고성에서 고을 수령인 현령을 지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만호라는 벼슬을 받고 판옥선 함장에 임명된다.

나라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현령직을 그만두고 스스로 수군에 들어가 최일선에 나선 권전은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이순신 장군과 생사를 같이 하며 끝까지 분투하다 선조 31년 11월 19일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나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또 한 번 이 문중 종손은 항일에 뛰어든다. 종손 권기일(1886~1920)은 천석에 이르는 전답과 종가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1911년 만주로 건너간다. 만주에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을 도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 설립해 자금을 대는 등 신흥무관학교를 지키던 중 일본군의 습격에 항전하다 나이 서른여섯에 순국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들이 순국한 후 문중은 풍비박산 났다. 오늘날 손자인 현 종손 권대용(66)씨는 택시 운전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조상들의 정신만은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

대를 이은 권씨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은 경북의 혼(魂)이자 한국의 혼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