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마실

▲ 대구 옻골마실
▲ 대구 옻골마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연서 안에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 잔잔히 흐른다. 가슴만 훑고 지나갈 가을이 서럽다. 뜨겁던 열정마저도 타버린 지 오래다. 오는 걸 원치 않아도 오고 가는 걸 잡지 않아도 가버리는 자연의 섭리 앞에 그저 겸허해질 뿐이다.

오래 갇혀 있던 흑백사진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역사이다. 낡은 사진첩 속에서 잠자는 시간을 깨워 보련다. 시간이 그림이 되는 그곳으로 마실 여행을 떠난다.

아담한 옻골 마실이다. 슬픈 홍자빛 얼굴로 애타게 임을 기다리나. 정자 옆에 소복이 고개 내밀고 서 있는 배롱나무. 백일도 모자란 슬픈 기다림이여. 백일 동안 피어 있다고 어떤 이는 도도하다고 하나 나는 오래도록 지지 않는 그 열정을 사랑하련다. 나른하던 몸이 솔 향에 가뿐해진다. 잡스러운 생각이 사라지고 사람들과의 부대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마실을 들어서면 수령이 35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시원함을 더한다. 나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수호신 역할을 해왔다. 이곳의 느티나무도 마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다. 마실 터가 주변보다 높아 금호강 지류가 훤히 보이므로 나쁜 기운이 마실에 들어온다는 설이 있었다. 마실 앞에 나무를 심어 액을 막았다. 동쪽에는 양의 기운이 들어오도록 숨을 텄고 서쪽에는 음의 기운이 강해서 숲을 조성하여 삿된 기운을 막았다고 이창환 문화해설사께서 설명하신다. 이제 푯말에 적힌 `비보 숲`이란 뜻이 이해가 간다. `비보(裨補)`란 부족하거나 약한 것을 보태거나 채운다는 뜻이니 상생의 의미일 것이다.

대구옻골마실은 산을 등지고 뜬구름이 흐르며 연꽃이 핀 형국이라 하였으니 한 폭의 수채화가 아니겠는가. 옻골, 칠계(漆溪), 칠동(漆洞), 칠원(漆員)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옻나무가 많았음을 짐작게 한다. 마실 뒤편으로 대암봉이 보인다. 거북이 형상이다. 사람들은 이 봉을 거북바위라 부른다. 예부터 거북바위에서 신령한 기운이 나온다 하여 거북이가 떠나지 않도록 마실 입구에 연못을 파 두었으며, 거북을 바라보고 집을 지은 이들이 있었다. 안 씨 집안이었는데 경주 최씨가 들어오고부터는 이주했다고 한다.

1616년(광해 8년) 조선 중기의 학자 최동집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경주 최씨 광정공파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최동집 선생의 호는 대암(臺巖)이다. 사람 마음속에 변치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아마도 발복을 기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최동집 선생의 호에서도 후손들의 번성을 기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종가를 중심으로 20여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귀한 것일수록 깊숙이 갈무리하는 것처럼 종갓집도 마실 안쪽에 위치한다고 했다. 이젠 어느 고택 마실을 가도 종갓집은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종갓집과 가까울수록 촌수가 가까운 친척이, 멀수록 먼 친척이 산다고 한다. 집을 한 채 짓는 데도 필요에 따라 지어진 것을 보면 민초들의 삶과 양반들의 삶은 분별이 있었다. 문화해설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양반문화를 모르고 지나쳤을 부분이다.

종갓집 가는 길은 우리나라 아름다운 돌담길 중의 하나이다. 소담하다. 울 밑에 봉숭아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곱게 찧은 봉숭아를 아주까리 잎으로 둘둘 말아 하룻밤 자고 나면 선홍빛으로 물든 손톱이 참 고왔었다. 손가락이 답답해도 잠결에 빼지 않으려고 잠을 설친 기억이 아련하다. 지난 시절은 늘 아름다운 한 장의 그림이 된다.

경주 최씨 종가인 백불고택(百弗古宅)은 대구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입향조인 최동집의 손자 최경향이 1694년에 지은 고택으로 대구 지역 가옥 중 가장 오래된 주택 건물이다. 오른편에는 영조 임금의 명을 받아 교정청을 설치하고 반계수록의 최초 교정본을 완료한 장소가 있다. 수록(隨錄)은 우리나라 사회제도, 법전, 국방, 외교, 정치, 일반적인 것을 통틀어 현실에 맞게 기록한 책인데 수록이 지어질 시점에는 백성이 보면 혼란하다 하여 영조는 금서를 내렸다.

`백불`은 조선 정조 때 학자인 최흥원의 호이다. 선생은 금서가 되기 전에 이 책을 읽고 감복하였었다. 이십 여년이 흐른 다음에야 영조는 교정청을 만들고 최흥원 선생에게 교정 책임을 맡겼다. 완료한 공으로 `사서삼경 언해본`을 하사받았다. 백불암 선생은 그때부터 유형원의 호를 따서 `반계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마실은 도포 자락 날리며 거들먹거리던 여느 양반가와는 다르다. 벼슬길에 나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는 학문을 닦고 지역에 많은 덕을 베풀었다. 곳간에서도 인품이 느껴진다. 곡식을 헤아려 근검절약하고 어려운 이웃이나 전쟁이 날 경우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울 것을 곳간 대문에 붙여 두었다. 경주 최부잣집의 6가지 덕목은 부자나 후세대가 본받아야 할 본보기이다. 이 마실도 경주 최부잣집과 다를 바 없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글공부를 많이 해서 글로써 교화하라는 항목이다.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가진 것을 나누기보다는 더 가지려는 게 사람의 욕심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가친척도 돌보지 않는 게 인심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이웃은 가까이에 있지만 마음 거리는 멀기만 하다. 우리는 선조들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나를 반추하고 숨겨진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기도 한다.

좋은 곳을 여행하면서 얻는 추억은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어스름이 드는 저녁, 문화해설사가 던진 숙제가 머릿속을 맴돈다. 백불고택의 서까래는 몇 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