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현의 역사인물탐구 ③
최치원

▲ 고운 선생이 신라 왕조 패망을 막기위해 글을 쓰던 상서장(上書莊) 정경.

“네가 당나라에 가서 10년 내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마라.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을 터이나 아무쪼록 부지런히 공부하여 이 아비의 소원하는 바를 잊지 말고 꼭 공을 세우도록 하라”

이 말은 신라의 최고의 천재이자 문장가 그리고 유불선 통합을 주창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나이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 떠나기 전 아버지 견일(肩逸)이 아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당나라로 유학, 18세때 외국인 대상 `빈공과` 장원급제
육두품이지만 신라 기성세력 견제로 초야에 묻혀
중국 평가는 최고… 기념관 건립·업적 소개 등 추앙


한국 교육 열이 높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도 아는 사실이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도 한국 교육열과 풍토에 대해 극찬을 하는 등 `대한민국의 힘이 교육에서 비롯됐다`며 인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서울 강남 8학군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교육투자는 보통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보이는 등 비난과 질시가 함께한다.

그렇다면 그언 1300년 전에 코흘리개 아이를 수천 리 떨어진 타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치원의 부는 당시 부유층인 6두품인 최씨며 6성의 하나로 진골(眞骨) 다음가는 상위 신분계급이며, 수도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일대 명문 집안이다.

 

▲ 고운 최치원 선생 영정
▲ 고운 최치원 선생 영정

치원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총명한 것도 분명하지만, 그의 집 경제력과 부모의 열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명성을 떨친 그는 본국인 신라에서는 유학파에 대한 견제 등으로 비운의 인물로 사라졌다.

신라 문성왕 19년(877)에 서라벌(현 경주) 미탄사지 남쪽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천재(天才)` 소리를 들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많이 보냈다. 신라가 유학을 장려한 것으로 보면 `인재양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원동력이 당시 고구려,백제 등 삼국 중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도 `삼국 통일` 이란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 때부터 시작된 당나라 유학에는 `국비 유학생`도 있었고 `사비 유학생`도 있었다.

국비 유학생은 귀족층 자제들인데, 당나라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다분히 `인질` 성격을 띠었다. 그는 서경(西京)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빈공과`는 당(唐) 이 외국인의 벼슬길 진출을 위한 과거제도다.

▲ 고운 선생이 글을 읽었던 독서당 마당에는 우물이 남아있다.
▲ 고운 선생이 글을 읽었던 독서당 마당에는 우물이 남아있다.

신라 청년의 우수성을 대당제국에 떨친 그는 20세에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등용된다.현위는 한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관으로 영장(令長).승(丞) 다음으로 높은 고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특히,그는 난을 일으킨 황소를 글로 제압한 격황소서(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885년 28살에 신라로 돌아왔지만, 신라는 쇠운(衰運)을 맞고 있었다.

당시 신라 조정은 사양(斜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랜 적폐(積弊)가 그대로 고질화돼 곪아 터지고 있었는데, 중앙의 권력심층부에서 이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얻은 명성이나 익혀 온 경륜(經綸)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성세력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육두품(六頭品)은 신라 17관 등에서 여섯째 등급인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그 이상의 승진은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신라사회는 진골이 권력층이었다. 그의 귀국을 기뻐한 헌강왕은 그를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하고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시켰다.

하지만 국정은 혼란스러웠고,이어 왕위 다툼 등으로 신라 세 번째 여왕이 등극하는데 그녀가 `진성여왕`이다.

진성여왕은 각간(角干) 위홍과 사통(私通)하는가 하면 위홍이 죽고 난 후에는 나이 어린 미장부(美丈夫) 두세 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기기도 했다.이렇게 되니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이 부분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어지러운 세상이고 지식인의 수난시대였던 것 같다.이같은 난세 속에 당에서 배운 그의 능력은 펼 길이 없었다. 신라 조정은 큰 그릇을 받아들일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34세 되던 해 그는 외직인 지방관으로 나가게 된다. 태산군(太山郡) 태수(太守)다. 태산군은 지금의 전북 태인(泰仁)이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고려 현종이 고운 선생을 문창후로 추봉한 유허비.
▲ 고려 현종이 고운 선생을 문창후로 추봉한 유허비.

“치원이 서쪽(중국)으로 가서 배워 많이 얻은 바 있다고 자부했다. 동(신라)으로 돌아와서 장차 자기 뜻을 펴려고 했지만, 쇠퇴해 가는 말기라 의심하고 꺼려서 용납되지 않았다. 드디어 외직으로 나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그가 한직으로 나간 것이 자의 반 타의 반이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시무책은 `비정상의 정상화` 등 적폐 해소책으로 추정된다. 이 또한 반영되지 않자 그는 금강산을 떠나 이름 모를 사찰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치원이 위대한 것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입증시켰다.

지난해 6월27일 시진핑은 박근혜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환영사에서 통일신라시대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한시(漢詩) `범해(泛海)`를 인용 소개했다.

또한 지난 7월 2차 한·중 정상회담 차 방한만 시 주석은 서울대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한국과 중국은 역사가 유구하다`며 `범해(泛海)`를 다시 거론한 것은 현재 및 미래 한·중국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중국에서 최치원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다. 그가 벼슬을 한 적이 있는 양저우시(揚州市)에서는 당성(唐城) 유적지에 최치원 기념관을 짓고 10월 15일을 `최치원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다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고 있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윤종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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