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옥곡 마실

▲ 경산 옥곡마실 전경.
▲ 경산 옥곡마실 전경.

슬쩍 스쳐 지나간 사람을 찾아 나서듯 부지런히 핸들을 돌렸다. 옥곡 마실에 들어섰다. 학원과 음식점, 미용실, 옷집이 즐비하다. 김밥도 사고 길도 물어볼 겸, 김밥집에 들렀다. 아가씨의 건조한 말투가 38도의 무더위를 싸늘하게 한다.

옥곡 마실은 몇 년 전에 지인이 살고 있어서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버스가 자주 다니질 않아서 교통이 불편했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상가가 밀집해 있어서 문만 열고 나가면 모든 것이 이 마실 안에서 해결되는 느낌이다. 시선이 상가로 쏠린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시속 10km로 액셀레이트를 밟고 있는 것 같다.

서울 살 때는 사람들한테 떠밀려 다녀도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 자연스러웠고 그게 사람 사는 풍경이라고 생각했었다. 대구에 내려와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이젠 적막함이 외로워서 분주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옥곡초등학교에서 아파트 단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옥곡동 청동기시대 유적 공원이 나온다. 도심 속에서 역사의 자취를 발견하는 기쁨은 크다. 사람이 살다 떠난 빈집처럼 발에 풀이 스친다. 화덕 두 개가 있는 시설물은 짓물렀다가 꾸덕꾸덕 마른 얼룩이 선명하다. 공원 안내판 지붕 위에선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안내판이나 유적 모형도 습기가 차서 알아볼 수가 없다.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 두근거리던 설렘으로 나선 길이었다. 첫사랑은 가슴에 묻어두어야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던가. 유적공원엔 황량한 바람이 분다.

돌널무덤을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무성한 풀이 경호라도 하듯 에워싸고 좀체 틈을 주지 않는다. 꼿꼿하게 서서 보려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결국은 쪼그리게 한다. 측면으로 보이는 무덤이 참 작다. 이젠 흙으로 주저앉아 역사의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버린 시간, 정적이 흐른다.

돌널무덤은 고인돌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형식이다. 석관묘라고도 한다. 구덩이를 파고 판돌, 괴석, 할석 등을 써서 돌널을 만들어 주검을 묻는다. 땅 위에 봉토나 상석 같은 표지 시설이 없어서 고인돌보다 발견되는 확률이 낮지만, 우리나라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옥곡동 청동기시대 유적은 경산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대규모 마실 유적이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어느 유적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고 한다. 이 곳은 2천500~3천년 전 청동기시대에 조상들이 큰 마을을 이루고 생활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초등학교가 바로 옆에 있어서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간여행일 것이다.

유적지 맞은 편 도로변에 긴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작은 쉼터인가 보다. 오다가다 이웃을 만나 정담을 나누며 차를 마시기도 하는 공간인 것 같다. 풀 한 포기 없을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청동기유적공원과 상반된 모습이다.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직진을 하면 막다른 골목이 나온다. 우회전해서 고가다리 밑으로 가면 삼의정(三義亭)과 우경재(寓敬齋)가 있다. 도심을 약간 비켜 있어서 그런지 풀냄새조차 싱그럽다. 짙푸른 초록의 향연에 눈이 시원하다. 계곡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마음이 시원하게 씻긴다.

삼의정은 순 소나무로 지은 사당이며 감룡문과 부속하당, 삼의정, 삼의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의정은 탁와(琢窩) 정기연 선생께서 생전에 여러 집안과 힘을 모아 임진왜란 때, 경산 의병으로 전사한 정변함, 정변호, 정병문 삼 형제의 충의와 학행을 추모하고자 건립한 것이다.

임란 때, 많은 무리의 왜적 떼가 쳐들어오자 수령이나 현령은 백성을 팽개치고 달아났다. 삼 형제는 문약한 선비지만 집안의 안위보다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삼 형제는 전란이 끝나고 이곳에서 은거하고 지냈다. 한 가문에 세 사람의 의사가 났다고 영남 일원에서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삼의사(三義士)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후세대가 지금도 편히 살 수 있지 않을까. 고개가 존경스러움에 저절로 숙여진다.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이 더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삼의정이 이런 분을 모신 사당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많이 알고 그분들의 뜻을 오래도록 기렸으면 좋겠다.

우경재(寓敬齋)는 삼의정 바로 옆에 있다. 국권침탈을 겪으면서 나라와 두 스승을 잃고 귀향한 정기연 선생에게 형님인 옥파공(玉坡公)이 마련해 준 은둔처이다. 선생은 초계(草溪) 정씨로 삼의사(三義士) 중 한 분인 동암 정변호 공의 9대손이며 한말의 성리학자이다. 경산시 옥곡동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으로 후진을 일깨우고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냈다.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우경재 앞 `성암칠절시서사제생(聖巖七絶示書社諸生)`의 시비이다. 

 `성암산 꼭대기가 하늘 높이 솟아 있어, 우리에게 한 번쯤 올라오라 권하네. 가다가 험난해도 두려울 것 없다마는, 띠 풀로 막힌 길을 쉬이 틀까 걱정일 뿐.`

옥곡마실은 지형이 골짜기보다 높다고 하여 굼각단, 골짜기에서 옥(玉)이 나왔다고 하여 옥골 혹은 돌산이라고도 불렀다. 경산의 죄를 지은 자를 가두는 감옥이 있어서 옥실, 옥곡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전해진다.

인생의 계절은 속절없이 빠르나 8월의 오후는 더디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