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현의 역사인물탐구 ②
윤신달

▲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의 태사공 윤신달 묘역 전경.<br /><br />
▲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의 태사공 윤신달 묘역 전경.

몸에 비늘 등 신비한 탄생설화 지닌 파평윤씨 시조
왕건 아들 혜종 견제로 경주 대도독 부임, 30년 선정
잉어와 얽힌 전설 유명… 포항 묘터 최고명당 꼽혀


파평윤씨(波平尹氏) 시조(始祖) 윤신달(尹辛達).

그는 신라 천 년 사직이 기울고 후삼국의 격동기에 왕건(王建)과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훈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이어 그는 태자를 교육시키는 태사(太師) 봉해지는 등 고려 초기 대표적인 인물이다.또, 그는 문무를 겸해 인의지도(仁義之道)를 제창했다. 특히 그는 고려 개국에 따른 민심수습(民心收拾) 일환으로 왕건에게 국정운영을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해야 한다고 주입시키는 등 멘토인 왕사(王師) 역도 했다.

그의 탄생 과정은 신비하다.

신라 진성왕 7년(893년) 8월15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로리 파평산 기슭 용연(龍淵)에서 옥함 하나가 떠 있었다. 이를 발견한 노파가 건져 열어 보니, 여기에는 오색 찬란한 깃털에 싸여 서기를 발산하는 옥동자가 들어 있었는데 그가 신달이다.

아기의 양쪽 어깨에 일월(日月)을 상징하는 붉은 사마귀, 발에는 북두칠성 형상의 7개 점, 좌우 겨드랑이에 81개 비늘이 돋아 있었다. 손금이 윤자(尹字)와 같아 노파가 성을 윤씨(尹氏)로 정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던 그는 파평산 금강굴에서 용마(龍馬)를 얻어 무예를 익히며, 파평산 정상을 비호같이 오르내렸다. 장성한 후에는 왕건 등과 막료가 되었다.

당시 후삼국 분위기로 궁예 곁에는 왕건,윤신달, 신종겸, 홍유 등 쟁쟁한 명장 걸사들이 있었다. 세력을 확장한 궁예는 국호를 후고구려로 하고 강원, 함길, 평안, 황해도의 북방지역을 장악,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태봉`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그러나 태봉왕 궁예는 날로 난폭하고 잔악해져 중신을 학살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이런 가운데 덕망이 높은 왕건에게 조정백관을 비롯 백성들이 따르게 되자 태봉왕은 왕건이 반역할까 두려운 나머지 관심술을 써서 “나를 반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고 호통치며 죽이려 하자 왕건은 소리치며 물러나왔다.

그후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유검필,박술연 등 제장들과 의논 끝에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키로 한 후 궁궐로 쳐들어가자 궁예는 궁중에서 빠져나와 강원도 부경으로(현 평강) 도망치다 피살됨으로 궁예의 폭정은 종지부를 찍었다.

918년 왕위에 등극한 왕건이 태조가 되어 국호를 고려라 칭하고, 송도를 도읍으로 정한 후 이탈된 민심의 호응을 얻었다.이어 신라 경순왕이 투항하고 이듬해 후백제 신검까지 정벌하는 등 완전한 민족통일을 이룩했다.

▲ 파평윤씨 시어인 잉어.
▲ 파평윤씨 시어인 잉어.
이 과정에 신달은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신달은 2등 공신에 책훈되어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공호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았다.

신달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와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했다. 그러나 태조 왕건 승하 후 왕위에 오른 혜종(943년)은 신달을 견제했다. 혜종은 그의 아들 휘를 볼모로 하고,그의 나이 51세 때 동경(현 경주) 대도독에 임명하여 신라 유민을 다스리게 했다.

그의 진가는 경주에서 발휘됐다. 당시 신라의 패망으로 현지인들이 고려에 불만이 누적됐지만 그는 `도의정치`로 선정을 베풀어 평화를 유지케 했다. 그리고 그의 동경 대도독 재임기간은 30년 동안 송도에 있는 가족과 한번도 상봉하지 못한 혈육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그는 임지에서 81세 일기로 현지에서 생을 마쳤는데 고향인 파평(현 파주)이 너무 멀었기에 현 포항시 기계면 봉래리 구봉산 사원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렀다.

그의 생전에 유명한 일화다.

어느 해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은 물론 산야에 초목이 고사할 지경에 이르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국왕이 제문을 지어 올리도록 문신들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문신들이 갑작스런 일로 생각이 안 나 주저하는 것을 본 신달은 “군신이 죄가 있으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을 마르고 타게 하나이까”(宣君臣之有罪甘受 災殃 奚草木之無知等 蒙草熱)란 글귀로 써 놓았다. 이를 지켜본 왕과 대신들이 명구라며 탄복을 하였으며,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쏟아졌다 한다. 또 파평 사저에서 송도로 말을 타고 조정에 입궐 당시 임진강 여음탄을 매일 도강했다. 그때마다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육지를 다니듯 하였다 하여 말이 물을 마신 나루를 여음 또는 음진이라 불리게 됐다. 그 후 용마가 죽자 기념하기 위해 파평산 치마대에 철마를 만들어 세웠으나 조선시대 철공(대장간)들이 이를 사용하고자 훔쳐 달아나다 직사 했고 후한이 두려워 흙으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

▲ 태사공 묘소를 모시는 분암영역인 봉강재.<br /><br />
▲ 태사공 묘소를 모시는 분암영역인 봉강재.
윤씨와 잉어에 대한 전설은 신달의 5대 손인 윤관의 일대기에도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 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 한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운주산 구봉하 유원에 예장 된 윤신달의 묘 면적은 2천900여평,봉강재 2천200여평 그리고 이 묘를 관리하기 위한 전답과 임야가 34만 평으로 왕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

이 묘는 풍수지리상 후손들이 무궁하게 발복한다는 금계포란형(鷄抱卵型)으로 천하명당이다. 국내 풍수학자들이 최고 명당으로 꼽는 묘터다. 이 묘는 한 동안 실묘됐다가 조선 영조 때 25대 봉정공이 경주영장으로 부임하여 묘소 부근을 파헤쳐 대부윤(大夫尹)이라 크게 부서진 비석 한 조작을 발견했지만 신달의 묘로 입증하지 못했다.

1739년 경상관찰사로 부임한 양래공이 7일간 그 주변을 샅샅이 뒤져 선지금강(先之剛)이라 새겨진 비편을 찾아내어 태사공 윤신달의 묘소임을 확인했다.

다음해 묘역을 봉축하는 한편 묘비와 기타 석물을 갖추고 제전 1석 지기를 마련하여 해마다 10월10일 시제를 정하여 지내다가 지금은 10월1일 추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봉강재(鳳岡齋)는 신달 묘소를 모시는 분암영역(墳庵領域)으로서 재사 본당인 봉서암(鳳棲菴)을 비롯 봉강서원, 봉강묘, 강학당 등 부속건물이 있다.

/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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