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ASIA` 발행인

1933년 독일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제1당으로 등극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했다. 많은 유럽인이 문제의 콧수염 남자를 주목했다. “히틀러가 독일 지도자가 됐으니 머잖아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평화를 역설했다. “평화 없이는 독일이 살아갈 수 없다” 프랑스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평화를 원하는 유럽에서 베르사유조약이 독일의 목을 죄고 있으니 평화를 지켜야 하는 거지”

베르사유조약이 독일의 목을 죄고 있다는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난 뒤 1919년 베르사유궁전에서 태어난 그것은 `평화조약`이면서 독일을 꽁꽁 조여 매는 사슬이었다. 전쟁배상, 군대제한, 영토축소, 해외식민지 포기 등을 담고 있었다.

`전쟁 배상금`은 전후 독일인의 삶을 곤궁 속으로 몰아넣고 독일경제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히틀러의 `평화 공세`에 안도할 때는 `군대 제한`에 더 기댔을 것이다. 독일은 공군을 가질 수 없다. 육군 10만을 넘을 수 없다. 탱크를 가질 수 없다. 이러니 베르사유조약이 건재하면 프랑스는 독일 군대에 대한 염려를 놓아도 좋았다.

베르사유조약 14년 만에 독일 대중이 메시아처럼 환영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 인간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신을 옥죄는 사슬을 싫어한다. 그것에 저항한다. 벗어나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히틀러는 그 본성을 정치적 변혁의 역동성으로 재창조하는 정치공학 방면에서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했다. 베르사유조약의 사슬에서 벗어나자. 이것이 히틀러에게는 중요한 국내 지지 기반이었다.

히틀러는 공군을 원했다. 민간항공기 개발을 명분 삼아 비행기를 생산했다. 기관총만 장착하면 전투기로 바뀌는 비행기들이었다. 조종사도 훈련시켰다. 육군이 10만 이하에 묶여 있으니 나치 완장을 두른 청소년단을 대대적으로 조직해 군대식 훈련을 시켰다.

1935년 3월 드디어 히틀러는 마각을 드러냈다. “베르사유조약에 규정된 공군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파기한다” 프랑스와 유럽 각국이 시끄러웠다. “쳐들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프랑스 평화주의자들이 막아섰다. 독일이 비행기 몇 대 있다고 뭘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행정부, 의회, 학계에는 평화주의자들이 넘쳐났다. 어쩌면 그들은 레마르크의 장편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 펼쳐진 그 끔찍한 전쟁의 트라우마에 몸서리치고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 뒤, 히틀러는 육군 제한 규정도 철폐한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군부가 들끓었으나 이번에도 평화주의자들이 그들을 무마시켰다.

1936년 3월, 히틀러는 크게 한 걸음을 더 나갔다. `라인강 서남쪽에 있는 독일 영토에 독일군은 프랑스 영토를 통과해 1명도 들어갈 수 없다`라는 베르사유조약의 규정을 무시하고 독일군 1개 대대를 진주시킨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군부가 이번에는 당장 쳐들어가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비겁한 평화`를 애호하는 평화주의자들이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주저앉혔다.

그로부터 3년 동안 히틀러는 최강 군대를 육성했다. 1939년 9월 어마어마한 기갑부대를 앞세워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의 40만 군대는 2주 만에 항복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프랑스로 쳐들어가 2달 만에 끝장을 보았다.

영국 처칠이 회고록에 썼다. “2차 대전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전쟁을 하겠다는 결심만 하고 그 결심을 히틀러에게 정확하게 통보만 했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이 후회는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라인강 서남쪽에 독일군 1개 대대를 진주시킨다는 선언을 해놓고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올까 해서 48시간 동안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이 회고를 남긴 인간은 바로 히틀러였다.

한국이 한 달째 세월호 참사를 감당하는 지난 15일, 일본 아베가 미국 오바마에 기대어 `집단자위권 행사`를 선언하고, 중국 시진핑과 러시아 푸틴은 포옹을 준비했다. 그날 아침, 나는 베르사유조약과 히틀러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