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계간 문학지 `ASIA` 발행인

2010년 1월27일 저녁, 베트남 하노이의 하노이대우호텔. 내가 쓴 평전 `박태준`의 베트남어판 `철의 사나이 박태준`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베트남 정관계, 재계, 학계의 실력자들과 주베트남 한국대사를 비롯한 현지 한국인들이 대거 가득 모였다. 나는 순차통역의 `저자 인사`를 이렇게 했다.

“한국에서는 제법 유명한 말인데, 저는`58개띠`입니다. 한국전쟁 후 베이비붐 세대지요. 고향 마을은 바로 포스코의 포항제철소가 들어선 곳입니다. 그 마을을 열 살 때 떠나야 했습니다. 포스코 때문이었지요. 그때 어른들은 스스로를 `철거민`이라 불렀습니다. 그 말은 고향을 상실하는 쓸쓸함과 뿔뿔이 흩어지는 서러움을 담았습니다. 원망과 저항의 감정도 묻었을 겁니다. 마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였을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벽안의 프랑스 신부가 이끄는 예수성심회의 백오십여 수녀들이 전쟁의 폐허와 절대적 빈곤이 양산한 고아들 500여 명을 돌보았던 겁니다. 암수 두 그루 커다란 은행나무가 정문을 지켜주는 아담한 성당에서는 일요일마다 청아한 성가가 울려 나왔지만, 마을 분교(分校)에는 교실이 두 칸밖에 없어서 1, 2, 3, 4학년을 이부제로 쪼개야 했습니다. 저의 짝꿍도 고아였습니다. 헤어진 뒤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른들이 낡은 트럭에 남루한 이삿짐을 싣는 즈음, 마을에는 `제선공장`, `제강공장`, `열연공장`이라는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저게 뭐지? 저는 그저 시큰둥하게 허공의 그것들을 노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나중에 듣게 됐지만, 제가 태어난 이듬해 12월24일, 그러니까 1959년 크리스마스이브, 런던 거리에는 크리스마스트리들이 찬란히 반짝이고 구세주 찬미의 노래들이 넘쳐났을 그날, 영국 BBC가 `a far Cry`라는 4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고 합니다. 런던에서는 머나먼 한국, 그 `머나먼 울음`은 굶주리고 헐벗은 한국 아이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그 아이들이 바로 저와 친구들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눈물 없이는 보지 못했을 그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아이들에게 희망은 있는가?`, 이것이었습니다. 그 절망적이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의 하나로서, 쉰 살을 넘어선 제가 보시다시피 조금 살진 얼굴에 점잖은 신사복을 입고 여기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날 무렵에 나부끼고 있었던 포스코의 깃발들이 한국의 희망이요 저희 세대의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이십 년쯤 지난 뒤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른아홉 살에 박태준 선생과 처음 만나게 됐고, 2004년 12월에 한국어판 `박태준` 평전을 펴냈습니다. 그 책은 2005년에 중국어로 번역 출판됐고, 오늘 이렇게 베트남어판이 나왔습니다. 작가가 왜 전기문학을 써야 할까요? 전기문학은 왜 있어야 할까요?

고난의 시대는 영웅을 창조하고, 영웅은 역사의 지평을 개척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과 체온을 상실한 영웅은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빚은 우상처럼 공적(功績)의 표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쓸쓸한 그의 운명을 막아내려는 길목을 지키는 일, 그를 인간의 이름으로 불러내서 인간으로 읽어내고 드디어 그가 인간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 이것이 전기문학의 중요한 존재 이유의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리 긴 세월이 흐르더라도 저의 주인공이 어떤 탁월한 위업을 남긴 인물로만 기억되는 것을 강력히 거부합니다. 그의 고뇌, 그의 정신, 그의 투쟁이 반드시 함께 기억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가장 저명한 인물인 박정희 대통령과 저의 주인공이 국가적 대의와 시대적 사명 앞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 서로 얼마나 완전하게 신뢰했는지, 또 그것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의 가치인지를 반드시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 민족, 시대라는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필생을 완주한 인물에 대한 동시대인과 후세의 기본예의라고 확신합니다”

평전 `박태준`을 피할 수 없는 드라마 `불꽃 속으로`가 18일부터 TV조선에서 방영된다. 드라마니까 허구를 피할 수 없다. 다만, 1959년 영국 BBC가 던진 그 마지막 질문에 대한 진실의 대답만은 결코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