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이준규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08쪽

한국 시단의 독자적인 징후이며 예외적인 프로파간다로 회자되는 시인 이준규의 네번째 시집 `네모`(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시적인 구성을 도모하지 않고 짧은 줄글로 작성된 72편의 산문시들은 내용도 형식도 없는 지표들을 제시함으로써 적막한 외관을 구축하고 있다. 온갖 수사를 배제하고 극미한 진술만을 통해 멈추어 있는 이 정물성은 감각에 순수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시인의 기획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데 간섭하는 모든 외적 요소를 차단하고 감각 자체만으로 대상과 마주하며 감정의 요동은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준규의 시어들은 완벽히 고립되어 있다. 동료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이수명은 이러한 이준규의 시를 가리켜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는 프로파간다”라고 했다.

이준규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모든 시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제시와 불친절한 단절의 외연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를 피하고 부사와 형용사를 절제한 결과, 시어에 감정의 물기가 스밀 틈이 없고 단어와 문장 들 사이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공동이 자리 잡는다. 그렇게 “있다” “있었다”와 같은 단순 진술만으로 포착된 이준규의 세계에는 아찔한 여백들이 시의 중요한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

“공터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끝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의 뒤로 테니스장이 있었다. 테니스장 옆에는 밭이 있었다. 비닐하우스도 있었다. 그곳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도로가 있고 도로 위에는 육교가 있었다. 공터의 다른 끝에는 아파트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가운데에 트램펄린이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트램펄린` 전문

이 시는 화자의 시선이 해가 지고 있는 시각에 공터를 시작으로 공터 주변의 대상들을 훑은 뒤 다시 공터 한가운데 놓인 트램펄린에 가 닿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화자의 위치를 허공에 두고 사물을 조망한다는 습관적인 독법은 이 시를 맛보는 데 별 소용이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여백을 읽어낼 때 비로소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놀고 있는 화자가 드러나는 것이다. 공터 가운데서 높이 솟구치길 반복하며 공터의 끝, 교회의 너머, 테니스장의 근처에 있는 밭과 비닐하우스까지 눈에 담는다. 대상들은 화자가 솟구쳤다가 가라앉는 사이사이에, 즉 여백과 여백의 틈에서 잠깐씩 드러난다. 시의 후반부에서 공터의 다른 끝, 화자의 시선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를 의식하는데, 그 아파트는 화자가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집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화자는 이 즐거운 유희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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