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태원 시인

사람과 사람 나라와 국민 사이에 신뢰가 없다면 살얼음판 같이 깨지기 쉬운 사회다. 남자들이 이발할 때 마지막 코스로 면도를 한다. 이발사는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시퍼런 면도날로 코밑과 턱밑의 거친 수염을 밀어낸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드러운 이발사의 손길에 잠을 자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발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정신이상자로 의심한다면 오금이 저려 면도는커녕 소름이 돋아 잠시도 앉아있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 그 이발사가 발광하거나 실수로 날선 면도날로 우리 경동맥을 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시퍼런 칼날 앞에 긴장을 하기는커녕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 잠의 나락에 빠져든다.

이와 같이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논어의 안연 편에 잘 나타나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어느 날 공자에게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는지 물었다.
공자는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튼튼히 하여 나라를 지키게 하며(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라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라고 대답했다. 나라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사회에도 신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공자의 메시지다.

불과 십여 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선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의 구국도 국민과 병사들의 장군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신뢰는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하지만 불신의 대가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하며 사회의 품격도 떨어지게 한다. MB정권에 있었던 광우병 파동이나 지난 연말부터 새해벽두까지 온 나라를 달궈왔던 코레일 민영화, 그리고 현재도 불꽃이 타고 있는 의료민영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 사회가 불신과 저신뢰 사회의 늪에 빠지게 된 원인은 부도덕과 부정직의 만연과 지나친 성과주의, 우월적 지위의 횡포인 갑을관계, 그리고 반이성적 사회 풍조와 양치기 소년 같은 정치인의 거짓말에 있다. 정치가 사회구성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갈등을 치유하고 해소하기는커녕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정파적 이해득실에 따라 인화성이 강한 사회적 이슈에 정치적 레토릭으로 오히려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면 신뢰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데에 있다. 기초자치단체의 정당공천제 폐지는 지난 대선 때 여야가 내세운 핵심공약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지금 여당에서 오픈프라이머리니, 지방자치단체 파산제 도입이니 뭐니 하는 것은 초점을 흐려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꼼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지자체 파산제가 도입되면 구조조정을 압박할 수 있게 되어 지자체장의 과시용 사업이나 선심성 사업에 과도한 예산을 쏟아 붓던 고질적인 병폐가 차단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산제가 좋으면 이미 시행중인 미국이나 일본같이 도입하면 될 터이고 정당공천제 폐지는 공약대로 지키면 될 일이다. 만약 이번에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정치 불신은 극에 달할 것이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붙여 눈감고 아옹하더라도 국민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정치인들이 왜 기초자치의 정당공천제라는 꿀단지를 철옹성처럼 그토록 고집하는지를.

`철강입국`이라는 기치아래 영일만 모래밭에 기적을 일궈내 포스코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창업자 박태준, 그의 뒤에는 “박태준을 건드리면 누구든지 가만히 안 두겠다”는 종이 마패와 함께 인사 및 경영에 대한 전권을 박태준에게 준 박정희가 있었다. 이들의 절대적 신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영일만 신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뢰가 서야 갈등이 사라지고 나라가 바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