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재영시인
12월도 아니 올해도 저물어간다. 인디언 호피족은 12월을 `존경하는 달`이라 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진정 충실했는지, 남을 많이 존경했는지 반성하게 된다. 사실 이름 앞에 `시인`이란 직함을 걸고 종종 글을 쓰면서 시인답게 깔끔한 문장에다가 절묘한 시적 언어를 조합해 글을 썼는지 반성할 때가 있다. 글이라는 것이 자동카메라로 사진 찍듯이 셔터만 누르면 그냥 써지는 게 아님을 백 번 천 번 깨달을 때가 있다. 더욱이 `시인`이란 명함을 내 놓을 땐 시(詩) 고료로 커피 몇 잔 마시기도 힘든 세상에 스스로 바보같은 사람임을 인정해 달라고 상대에게 확인받는 느낌이라 쌉싸래하다. 그래도 내 직장이 있고 그곳에서 나오는 월급이 있기에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더욱이 내가 머물고 있는 직장이 교육현장이다 보니 맡고 있는 학생들에게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가르치려했지만 되돌아보면 부족하고 부끄럽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어렵지만 그만큼 보람찬 일이다. 맹자님 말씀에 `군자삼락(君子三)`이란 것이 있다.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에서 양친이 살아 계시고 형제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해 훌륭한 인재를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군자삼락의 하나라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사실 요즘 가르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과 달리 다양한 직업이 있는 만큼 배우는 학생들도 다양한 꿈을 갖고 있고 그 실현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교단 현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의 모습은 산만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학생들이 많다.

며칠 전이었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서성인다. 문을 열고 보니 예전에 가르쳤던 제자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선생님이 생각나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말썽을 많이 피우던 제자였다. 너무 의젓한 모습으로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사람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임을 다시 깨닫게 해 주는 만남이었다. 그런 일은 흔치 않은 일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며 종종 겪게 된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성공하면 선생님 찾을 필요 없다. 대신 힘들 땐 선생님을 찾아오렴. 소주 한잔 나누며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다.” 예전에 제자들과 헤어지며 했던 말이다. 어떤 면에서 돈을 벌기 위한 한 방법으로 교직생활을 하지만 그것은 시를 쓰는 일 이상으로 보람된 일이고, 감사할 일이며, 미래의 인물들을 만나는 특별한 혜택이라 고마울 뿐이다.

얼마 전 지역 문학단체의 봉사자로서 중견 소설가를 초빙해 강의를 부탁했었다. 오래 전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사표를 낸 전업 작가였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학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현재 중견소설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냥 있으면 지금쯤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경력이 됐을 텐데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자 “삶은 한 번 있는 생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일은 축복일 거예요. 작지만 운명적인 이야기 집(소설)을 짓는 일은 행복을 만드는 일입니다.”

존경하는 달이라 인디언 호피족이 이야기했던 12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소설뿐이겠는가. 인간살이가 다 운명적인 만남의 씨줄과 날줄로 얽히는 것 아닌가. 두 번 살 수 없는 삶의 한 선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미치는 일은 고돼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그것이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 되는 것 아닐까. 우리 사회는 지금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당리당략과 이해타산에 집단적 행동을 요구하게 만드는, 그러면서 상대편은 무조건 타도의 대상으로 몰고가는 불안정한 사회가 되고 있다.

내가 당신을 존경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당신의 요구대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그냥 신뢰할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