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기자단의 두바퀴路
⒂ 포항시 북구 흥해읍

▲ 자전거 기자단이 흥해읍 성내리 영일민속박물관을 찾아 어린이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점점 추워지는 계절, 초겨울 바람에는 향기와 낭만과 그리움이 스며있다.

먼 옛날 동해안 방어의 요충지로 넓은 들과 함께 농토가 비옥하다 하여 지어진 흥해를 찾아 떠나는 자전거 여행의 즐거움은 바다처럼 넓고 바람처럼 자유롭다.

모성은 교수와 박계현 (사)문화와시민 이사장이 흥해의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인 흥해향교에서 만나자며 자전거에 먼저 오른다.

흥해향교, 조선 태조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공자 등 성현 위패 모셔… 지금은 제사기능만


□흥해 향교

조선 태조 7년(1398)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흥해 향교를 향해 떠나는 자전거 길은 초겨울의 신선한 바람으로 더욱 흥이 난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7호로 지정돼 있는 흥해읍 옥성리 132에 위치한 흥해 향교 대성전에 도착한 건 오전 9시. 이 지역에서 태어나 30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아온 흥해 토박이 채대원씨와 이병창 전교, 장두철·진석찬·정재학 전임전교가 반긴다. 전화로는 이미 여러 차례 통화해 구면 같은 사이다.

“흥해 향교를 찾아오는 길은 지금도 아름답지만 경북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이팝나무 군락에 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도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 합니다.”

이병찬 전교는 흥해 향교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시작했다.

“옛날 한 가난한 선비가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요. 하루는 어머니가 흰 쌀밥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쌀독을 보니 쌀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어머니만 밥을 지어 드리면 틀림없이 아들에게 다 덜어줄 게 뻔했습니다. 아들은 고민하다 머리를 짜냈고 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서 하얀 꽃을 듬뿍 따다가 자신의 밥그릇에 담았습니다. 눈이 어두웠던 어머니는 아들도 쌀밥을 먹는 줄 알고 맛있게 잘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나무는 이밥나무가 됐고 음이 변해 이팝나무가 됐다는 설이 있습다. 혹자는 이씨(왕족)들이 먹은 하얀 쌀밥, 이씨들이 먹는 밥이라 하여 이밥나무가 됐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효자의 나무, 이팝나무 군락지는 봄이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 흥해읍 옥성리에 위치한 흥해향교.

장두철 전임전교는 “여기 꽃이 피면 온 산이 하얗게 돼 잎이 꽃에 묻힐 정도”라며 자랑을 그칠 줄 모른다. 고목들은 모두 한아름에 안을 수 없을 만큼 둘레가 크고 높게 뻗어 있다. 이 군락지에서는 매년 어르신들을 위한 이팝나무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군락지는 고려시대 충숙왕 때인 14세기 초 이곳에 향교를 세우면서 기념으로 심은 나무에서 종자가 떨어져 번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100~150년가량 된 고목이 34그루, 최근 심은 나무까지 모두 50여 그루의 이팝나무가 자라고 있다. 꽃나무 아래 벤치도 초겨울의 서정을 더해준다.

박계현 문화와 시민 이사장이 문화적 해설을 시작한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입니다. 흥해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지었다고 전하나, 연혁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때 대성전과 동무만 남고 모두 불타 없어졌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복원했습니다.”

탐방단은 지금 남아 있는 건물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을 둘러본다.

“대성전은 1970년에 기와를 새로 고치고, 1971년에 단청보수를 통해 복원했습니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이뤄진 대성전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의 끝을 날카롭게 했고, 위에는 구름 모양의 장식을 입혀 섬세하고 화려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둥 사이에는 위쪽의 무게를 받기 위해 당초무늬와 연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꽃받침을 설치했습니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 흥해읍 옥성리에 위치한 흥해향교.

□ 영일민속박물관

탐방단이 흥해읍 성내리 영일민속박물관에 하나 둘 씩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30분. 이팝나무 군락지에서 5분 거리다. 조선시대 흥해군의 동헌이던 제남헌을 수리해 민속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지정된 박물관이다.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야외 수업을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과 외국인 교사들도 감탄사를 연발한다. 먼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용하던 생활용구와 농업 및 어업 기구, 고서적, 토기, 의복 등 4천600여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구 영일군과 영일문화원이 공동으로 향토 풍습과 민속 유물을 보존하고자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헌종 원년에 건설된 흥해군의 동헌 건물을 수리해 1983년 개관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하며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에 문을 닫는다.

“1983년 10월 29일 개관 이후 1985년 5월 제2전시실을 신축하해 박물관의 면모를 갖춤으로써 당시 군단위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1987년 6월 30일 문화부로부터 준박물관으로 지정되었습니다. 4,297㎡의 대지에 약 495㎡ 규모의 전시실을 갖추어 지정문화재 1점(濟南軒)도 보관 하고 있습니다.”

김환복 박물관 담당자의 설명에 이어 앞뜰에 있는 수령 600년된 회화나무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나니 뿌듯한 마음으로 다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 자전거 기자단이 흥해읍 성내리 영일민속박물관을 찾아 어린이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흥해시장 5일장을 찾은 모성은 교수가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시골장터 특유의 부산함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 흥해 5일장

황진후, 하정민 지역 인사가 장터를 앞장선다.

“장터국밥은 장날이면 맛볼 수 있는 서민들의 별식이기도 했지요. 거기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는데요. 오늘날 많은 5일장이 사라졌어도 도시 한복판에서도 `장터국밥` 메뉴를 내건 식당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번 찾아가 볼까요?”

장터구경을 따라 나서니 이선덕 은하수로타리클럽 전회장과 여성 탐방대원들은 더욱더 신이 나는 모양이다. 동해안 최대의 상설시장인 죽도시장 못지 않게 물이 번득거리는 생선들이 싱싱한 비린내를 풍기고 식육점의 근육질의 어깨는 땀이 맺히고 그릇전에는 김장독 옹기들이 말갛게 얼굴을 씻고 나란히 앉아 있고 건어물 상가, 어패류 상가, 회집, 과일·야채 가게, 쌀 가게 등 없는 곳이 없다.

장터 한쪽에 임시로 차린 국밥집의 가마솥에서는 돼지머리가 둥둥 끈 국이 김을 뿜으려 부글부글 끓고 있다.

잘나고 못난 것도,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는 것을 빼고 있는 것은 흥해 5일장에 다 있었다.

이 세상이 거기 다 있는 듯 했다.

 

◇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 문화가이드:박계현 (사)문화와시민 이사장

◇자전거 협찬:서일주 포항녹색희망자전거사업단 단장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취재동행:이명희, 이영숙, 이선덕, 김효은, 노경훈,

◇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 흥해시장 5일장을 찾은 모성은 교수가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시골장터 특유의  부산함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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