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기자단의 두바퀴路 ⑸ 한의학의 큰 스승 石谷 이규준 선생을 찾아서

▲ 두바퀴路 문화탐방단이 포항시 동해면에 위치한 석곡 도서관을 찾았다. 이곳에서 탐방단은 포항 출신 조선말 한의학자인 석곡 이규준 선생에 대해 향토 사학자 황인선생의 특강을 들었다.
어느덧 (사)문화와 시민의 `두바퀴路`가 5회째를 맞는다. 이번에는 조선말 한의학자 석곡 이규준을 찾아 나섰다. 취재단은 포항시 동해면으로 `두바퀴路`의 노란깃발을 펄럭이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숨겨진 향토문화자산을 찾아내는 재미가 솔솔 일기 시작했다. `두바퀴路` 문화탐방단의 가슴에는 저마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수줍은 소녀처럼 콩닥콩닥 심장이 뛴다. 취재단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광복을 염원하던 이육사의 `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영글었던 동해 석곡도서관이었다.

포항 동해면 출생, 일반인에 잘 안 알려져
양기로 病 설명한 <扶陽論> 등 뛰어난 업적

 향토사학자 황인 선생이 `두바퀴路` 취재단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석곡도서관에는 석곡의 문집들과 관련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석곡 이규준(1855~1923)은 사상의학으로 잘 알려진 이제마(1837~1900)와 함께 근대 한의학계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포항이 낳은 영남 한의학의 큰 스승이다. 

 이규준은 1855년 동해면 임곡에서 출생한 후 석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들 지명을 따서 호를 `석곡(石谷)`이라 하였다. 석곡은 석곡서당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육경주소(六經注疏)에 자신의 주장을 담은 토를 달아 `경서주소(經書注疏)`를 남겼다. 특히 석곡은 한의학자로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주요 의서는 `동의보감`을 요약한 `의감중마(醫鑑重磨)`와 `내경소문`을 요약한 `황제내경소문대요(黃帝內經素問大要)` 등이 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체질에 따른 조화를 중시하는 의학이라면, 이규준의 부양론(扶陽論)은 양기의 부족 때문에 병이 생김을 역설하고, 부족한 양기를 도와주어 본래의 건강한 기운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향토사학자 황인 선생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이제마와 이규준의 의학 이론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완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석곡의 부양론은 아직 일반인에게 생소합니다.”
 감춰진 향토 문화자산을 찾아 나선 취재단의 눈빛이 반짝인다. 황인 선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심지어 선생의 고향인 우리 지역에서 조차 그 존재감은 미흡합니다. 석동에 위치한 석곡 선생의 허름한 생가 부엌 한구석에는 600여 개의 목판이 나뒹굴었으나 지금은 그 절반이 사라지고 364장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최근에야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보관 상태는 매우 불량한 편입니다.” 
 누구보다 먼저 석곡의 소중함을 알고 그 목판본이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힘쓴 주인공이 오늘 특강을 맡은 것이다. 석곡도서관이 세워지기까지 불철주야 의기에 찬 황인 선생의 지난 모습이 눈에 선하기만 하다.
 한의원을 경영하는 김학동 한의사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석곡이 남긴 의서를 연구하고, 그의 의술과 뜻을 기리는 전국 한의사들로 구성된 학회가 있습니다. 1991년 석곡의 제자인 무위당 이원세 선생을 모시고 한의사들이 석곡학회를 창립하였고, 이듬해 다시 소문학회로 명칭을 개정하여 현재에 이릅니다.”

 영남문인 화맥 석재와 각별한 교류

 부산대에서 한문학을 강의하는 신일권 박사가 덧붙였다. “석곡의 재조명은 그의 학맥에서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석곡의 유학은 당시 영남지역의 주류인 퇴계학맥에서 벗어나 율곡 이이 → 우암 송시열 → 매산 홍직필 → 임재 서찬규 · 입헌 한운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영향아래 있었습니다. `석곡산고`를 살펴보면 석곡 자신은 임재 서찬규에게 나아가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석곡과 석재의 교유관계를 연구했던 이나나 박사가 한마디 거든다. “석곡은 석재 서병오와도 교유하였습니다. 서병오는 호남 문인화맥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추사 김정희 → 석파 이하응 → 석재 서병오로 이어지는 영남 문인화맥의 개조입니다.”
  1901년 3월14일 석곡은 스승인 임제 서찬규를 문안한 후 석재 서병오의 집에 열흘간 머물렀다. 당시 팔능(八能)으로 전국에 알려졌던 서병오의 집은 날마다 풍류와 서화로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석곡산고`에는 `석재의 서화가 오묘함을 알고 그것을 배우려 했지만 잘 할 수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서병오 또한 중국 주유 중에 서화가 포화(蒲華)의 병을 고쳐줄 정도로 의술 역시 일가를 이루었는데 의학에 밝은 석곡과 서화에 뛰어난 석재는 서로 두터운 통섭의 교유관계를 이룬 것으로 판단된다.  

 
 포항 문화인물로 재조명 필요

 석재가 석곡의 죽음을 애도하여 계해년(1923)에 지은 시가 있다.
 
 “先生大道本於天  석곡의 큰 도는 하늘을 근본 삼았으니
 俛仰羲皇立志堅  복희씨를 우러러 세운 뜻이 견고하였네.
 一自河圖生八卦  한번 하도에서 팔괘를 만들어
 鴻荒重闢二千年  태고의 시대에 거듭 이천년을 열었네.”
 
 이 시는 석곡의 사상이 복희씨를 근본으로 했다는 내용이다. 즉 석곡이 서당을 열어 글을 가르치고 의술을 펴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여러 저술을 남긴 것들이 모두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쳐 사람답게 살도록 한 것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내용이다.
 석곡과 가까이 했던 석재는 이미 영남 최고의 근대 서화가로서 대구 지역에서 크게 조명되었다. 이제 석곡 이규준도 근대 영남 최고의 한의학자로서 포항의 문화인물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마침 부산대학교에서는 5월28일 `석곡 이규준의 현대적 의미와 학제간 모색`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석곡의 학문이 이제 학계에서 조차 깊게 조명되는 시점에 이르렀으니 이제 포항지역에서도 이러한 소중한 향토문화 자산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것이다.  
 문화와 시민 박계현 대표가 한마디 한다. “그 동안 몇몇 지역을 두 바퀴로 달리며 느낀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지역에도 정신적 문화유산이 충분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문화유산이 아무렇게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메타입시학원 장재향 원장이 박 대표의 말을 잇는다. “이제 포항에도 이러한 문화자산을 제대로 관리하고 보존할 수 있는 박물관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포항의 향토문화인물의 발굴은 시대를 초월한 그들의 정신과 만남이며 포항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여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포항 오는 사람은 석곡 만나야”

 이번 `두바퀴路`는 지난 어느 답사보다 인문학적으로 열띤 학습의 장이었다. 취재단 구성원들이 마침 석곡 이규준을 중심에 둔 한문학, 향토사학, 한의학, 영남서화에 전문성을 지닌 관련 연구자들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심도 있는 문화탐방이 된 것이다.
 인문학의 중요성이 논의되자 한마음사랑후원회 권기봉 회장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중국 전역을 유람하는 것보다 옹방강(翁方綱)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역시 누군가 저에게 포항에 가볼만한 곳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포항 전역을 보는 것보다 석곡 한 분을 만나는 것이 낫습니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문화탐방에 동참한 취재단의 함성과 함께 우뢰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문화특강:황인 (향토사학자), 손국락, 정기석
 △집필지도:신일권 (한문학자)
 △청소년기자단:김보름, 김유민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동행취재단:박계현, 강성주, 김학동, 박창현, 권기봉, 김명헌, 정경식, 박창교,  이길호, 김영미, 이나나, 장재향, 김경희,  
 △제작책임

▲ 두바퀴路 문화탐방단이 포항시 동해면에 위치한 석곡 도서관을 찾았다. 이곳에서 탐방단은 포항 출신 조선말 한의학자인 석곡 이규준 선생에 대해 향토 사학자 황인(위 사진 왼쪽) 선생의 특강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