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우 편집국장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부적절한 행동은 지금까지 논란이 된 `갑질`의 완결편이었다. 이젠 성추문 본질은 물론이고 귀국 과정을 둘러싼 진실 공방까지 벌어져 호사가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직접 사과 요구까지 나오면서 국격 논란으로 확산되니 청와대로서는 방미 성과 자랑은커녕 사태 수습이 발등의 불이 됐다. 갑의 도를 넘는 불법적 횡포는 을의 대응에 따라서는 이렇게 한 방에 추락할 수도 있음을 실증한 셈이다.

남자접대부, 이른바 호스트바가 처음 생겨난 것은 여성 손님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식 접대문화에서 언제나 을로서 남자 손님의 비위만 맞추던 여성들이 이른바 고객으로 신분 상승한 것이다. 언제나 을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강요당했던 여성 고객이 갑으로서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곳이 호스트바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런 호스트바의 고객이 이젠 가정주부나 여대생 등 나이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인 을을 갑으로 만들어 주는 곳, 그것이 남자 접대부가 등장한 배경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을은 갑이 되고 싶어 한다.

갑의 횡포를 막는 방안의 하나로 계약서상의 표현에서 갑과 을을 바꿔 쓰는 안이 나오고 있다. 아예 갑이나 을 대신 구매자와 공급자 등 실명제로 표기하는 계약서가 등장할 태세다. 갑과 을은 단지 계약서상의 관계를 대신할 뿐이다. 갑과 을로 표현되는 거래 당사자는 계약에 따른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 의무를 위반하면 물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계약이라는 것이 언제나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일대 일의 평등한 조건은 더욱 아니다.

갑과 을을 바꿔 쓴다고 갑과 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기는 `기브 앤 테이크`의 서로의 필요를 충족하는 관계이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한 쪽은 칼잡이를, 다른 한 쪽은 칼날을 잡게 되는 것이 갑과 을의 관계다. 칼자루를 잡은 쪽에서는 그러다보니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틈만 나면 더 많은 이득을 취하려 하고 여기서 을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중국 북경에서 중국 상인들이 개성상인이 가져온 인삼을 사지 않겠다고 담합했다. 천리길 국경을 넘어 힘들게 가져온 인삼을 도로 가져갈 리는 없을 테고 결국에는 손을 들고 헐값에 내놓을 것이라 계산에서였다. 갑의 횡포였다. 뒤통수를 맞은 개성상인들이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인삼 뭉치를 객사 마당에 쌓아놓고 `헐값에 넘길 바에야 차라리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며 불을 질렀다. 중국 상인들이 혼비백산, 담합을 풀었다는 얘기다. 개성상인들은 두 손 든 중국 상인들로부터 인삼 값을 예년의 두 배로 쳐서 받아냈다. 을이라고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는 사례다.

비즈니스석 승객의 여승무원에 대한 갑의 횡포 파문은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대리점에 대한 욕설 파문으로 세상 모든 영역에서 반대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남양유업이 악덕기업으로 매도되면서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임직원이 공개 사과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성난 민심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비즈니스석의 갑도, 유통업체의 갑도, 심지어 해외 순방 외교에서의 갑도 도 넘는 횡포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을은 갑이 되고 싶다. 아니, 적어도 갑의 횡포를 깨뜨리고 싶다. 다행히 사회적 흐름이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한 법과 사회적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는 분위기다. 을의 적극적 의지가 필요하다. 남양유업의 경우처럼 을이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또는 인삼을 불사른 개성상인처럼 피해를 각오하고 상황을 깨뜨리려는 각오와 실천이 필요하다. 아니면 워싱턴 대사관의 인턴 여대생처럼 또는 비행기 여승무원처럼 사실을 공개하고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용기가 그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려는 성숙한 국민의식이 갑과 을의 지배 피지배 구조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