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종흠 시사칼럼니스트

인간의 가장 근본 질문은 `왜 사느냐`이다. 이 질문에 명료한 답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 경지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귀영화 등 나름대로 세속적 삶의 목표를 가지고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늙고 병들고 세상을 하직하는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간다고나 할까. 인생이 세속적인 삶에 만족하면서 늙어간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살다가 어떤 고비마다 부딪히는 이 근본 질문에 막히면 한없는 좌절과 고독,우울, 때로는 자포자기에 이르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된다. 자기 스스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죽음을 생각하는 절박감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죽음에 내몰리는 사람이 2009년 현재 하루에 42명이나 돼 자살률이 OECD국가 중 1위라고 한다. 사망원인별로 보면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순으로 높고, 자살증가 추세도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제 한국인은 소득 2만달러-인구5천만 클럽의 세계7위 강국에 진입했다고 자랑스러워하지만 살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국민이 증가하는 속도는 그보다 더 빨라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국가적 성공과 영광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국민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다.

1960~1970년대에 우리 국민들의 눈에 비치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선진국들은 감히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아득히 먼 천상의 국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것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중국, 인도 등을 앞질렀고, 유럽에서는 스페인 러시아 등 쟁쟁한 나라들을 뒤로 한 채 이들과 어깨를 겨누게 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 대견스러워 할 만큼 대단한 발전이고, 성장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같은 압축 성장의 뒤안길에 그만큼 큰 좌절의 벽이 가로놓인 줄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성장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경쟁에서 지속적으로 승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로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최상의 가치로 인정된다면 경쟁에서 뒤진 사람이나 처음부터 경쟁의 대열에 줄서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존재, 가치없는 존재로 취급되고 마는 것이다. 더욱이 경쟁이 잣대가 되는 사회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공동체가 경쟁원리에 따라 구조가 바뀌게 되고, 그에 따른 공동체의 해체는 기성체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로할 장치 마저 잃어버리는 위기를 가져왔다. 자기상실을 치유하는 기능을 가진 기성 종단마저 소외된 이들에 대한 교화와 치유보다 성공한 경쟁자에게 기울고 있는 현상은 이 세상 어디에도 따뜻한 삶의 손길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못살던 시절, 우리 국민들은 돈만 많이 벌고 물질적으로 성공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지금 우리는 다시 삶의 원초적 질문에 부딪쳤고,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인식 없이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아무리 자살예방을 위한 사회정책을 수립해도 우리 사회의 바탕에서부터 사람 본위의 사회를 만들지 않는다면 결코 자살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인본사회의 핵심은 모든 가치의 중심이 사람이란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경쟁의 낙오자나 경쟁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돈과 지위로만 평가하지 말고 꼭 같은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대우하자는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은 수단이 아닌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만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인식이 심어질 것이다. 종교에서도 인간만이 천국에 갈 수 있고, 인간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존엄한 위대성이 현실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인간의 자존감이 우러나오게 하는 인본적 성숙성을 가질 때 우리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자살은 저절로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