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

경주에는 사직단이 없다. 문중마다 묘당묘우는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나라를 열고 정신문화의 시조를 모실 사직단이 없다. 물질문명이 풍요로워지고 수출 7위, 세계 13위 경제대국이 될수록 출발의 기본과 정신문화의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경주는 정신문화의 고향이다. 한국 문학의 성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곳이 경주이기에 더 그렇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과정이 가려졌을 뿐 경주에는 여전히 해동의 빛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곳이다.

우리나라하면 신라와 경주를 가장 상징적으로 내놓을 수 있고 다음이 서울이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걸작 예술 체계를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이자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국적인 예술을 간직한 역사도시다. 그래서 경주사람들과 신라 육성 후손, 범 신라김씨 후손들이 신라종묘전과 역사 문화관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신라 종묘전과 역사문화관 건립추진위원(위원장 장윤익)회는 남산이나 신라 왕경 주변 35만㎡의 부지에 전통 한옥 골기와 집(연면적 7천218㎡)을 짓기로 했다.

영역별로는 먼저 화백회의를 탄생시킨 사로국 6부촌장전과 신라 56왕전을 비롯해 역사문화관 등 18채를 4년에서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준공할 계획이다. 이같은 성역화 대역사에는 398억원이 들어간다. 추진위원회측은 국책사업으로 추진해 줄 것을 정부 당국에 건의했다.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뜻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의 시원은 신라로 볼 수 있다. 민족의 시원을 신라로 보는 학술적 근거는 우리나라 성씨의 대부분이 경주중심의 신라 성씨에서 비롯됐다. 경주는 알의 신화로 출발해서 삼국을 통일시켰다. 알은 시작을 알리는 첫 순서다. 알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성장은 삼국을 통일시키고, 세계를 놀라게 할 단초가 되는 출발을 의미한다. 예술의 가치는 더 크다. 우리 역사에 신라와 신라 예술을 빼고는 어떤 자랑거리도 없다. 더욱이 신라가 통일을 한 이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계보는 사라졌다. 역사학자 이종욱 교수는 “현재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민족의 기원이 단군이라고 돼 있지만 이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신라 화백회의는 기원전 57년 전 일이다. 박혁거세 치세기간이었던 BC 58년은 서양에서는 로마의 영웅 카이자르가 로마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미미한 시기였지만 신라는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신라향가가 우리근대 문학사에서 되살아나듯 신라의 지배층은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의 귀족으로 남았고, 조선의 양반사회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봐서 신라사는 우리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은 대중을 향해 공손한 표정도 있고 부처로서 갖는 위엄과 자애로움을 모두 갖추었는가 하면 인체의 비례가 뛰어나 예술적 가치마저 백미에 이르렀다. 석재의 질감과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 불상이 간다라에 쓰인 붉은색 석재를 썼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예술의 가치가 나올 수 없다. 신라 예술이 세계에서 으뜸이 될 바탕이고, 혼이 담긴 불(佛)이다. 간다라에서 출발한 불상이 해동의 끝, 신라에 와서 완벽하게 태어났다.

화엄학을 해동에 내놓은 원효스님이나 지금도 대문장가로 추앙받는 최치원을 비롯해 해동 필신(筆神) 김생, 김유신 등 숱한 인재가 나고 불국사 첨성대 등 나라를 대표할 문화유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역사의 현장은 여전히 잡초에 묻혀있고, 성벽과 초석은 담 모퉁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하면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고분은 역사적 가치조차 상실한 채 천대를 받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역사문화관은 이런 신라를 찾아내고 새롭게 정신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할 곳이다. 그러나 400억원 예산 확보가 문제다. 서해안 현수교 예산의 절반이 되지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막막할 뿐이다. 대통령 선거도 끝났으니 어디에다 기대볼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