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는 우리 시대의 절박한 요청이며 과제다.”

이 시대적 숙원을 정치와 통치의 차원에서 처음 외친, 우리 사회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과제로 처음 제기한 인물은 고(故) 박태준 선생이다. 그때는 1997년 늦가을이었고, 그해 12월에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그것은 우리 현대사에 새 지평을 개척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때 박태준의 외침은 고독한 것이었고, 그만큼 사회적 반향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대통령 김대중은 그 고독한 외침을 하나의 유언처럼 고스란히 후대의 과제로 남겨둔 채 청와대를 나와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정확히 15년 세월이 흐른 올해 12월, 박태준의 그 고독한 외침은 대선의 한국사회 안으로 마치 거창한 메아리처럼 부활해왔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대통합의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그것을 거대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다. 민주화의 상징이라 할 만한 인물들과 보수의 표본이라 할 만한 인물들의 정치적 행동도 이어졌다. 물론 그들에 대해 보수냐 진보냐 따위의 진영논리에 매몰된 인간들이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만드는 언어를 동원해서.

이제 선거는 끝났다. 과연 15년 만에 거창한 메아리처럼 돌아온 박태준의 그 고독했던 목소리는 대통합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단초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과연 새 대통령 당선자는 약속한 대통합의 시대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대통합의 시대를 이룩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은 무엇일까?

5년 전 이맘때, 포항 사람들이 좋아라고 날뛰고 있던 그때,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이명박 당선자에게 충고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명박 당선자의 최대 공약이었던 `대운하`를 하루빨리 포기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내 주장의 요지는 이러했다.`대운하가 옳은가 그른가의 논쟁은 덮어두더라도, 대운하를 강행하면 우리 사회에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골짜기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국민대통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통치불능의 사태를 초래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실패 요인에는 너무 오래, 너무 집요하게 대운하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 대통령이 개척해야 하는 국민대통합의 시대는 결코 녹록한 과제가 아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갈등은 여러 갈등이 혼재된 복합갈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영남과 호남의 갈등으로 직결됐고, 좌파와 우파의 이념대립을 낳았으며, 기성세대와 신진세대의 세대 갈등으로 번져갔고, 더 나아가 남한과 북한의 체제대결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해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첫 걸음은`박정희`를 역사 속으로 보내주는 일이다. 물론 민주화세력이라 자칭하는 정치적 지도력이 먼저 나서야 한다. 그들이`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역사 속으로 보내는 용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중국의 등소평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등소평은 모택동에 대해 “공은 7이요, 과는 3이다”라고 정리한 뒤로 더 이상 모택동을 정치적 논쟁으로 삼지 않았다. 대통령 박정희에 대해 그와 비슷한 정리를 해줬어야 할 사람은 대통령 김대중이었다. 박정희의 사람들인 김종필과 박태준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미적거리지 말고, 자기 세력의 눈치도 보지 말고, 아주 의연하게 박정희에 대해 `공은 7이요, 과는 3이다`라는 정도로 정리하고, 마침내 박정희를 역사 속으로 보내서 쉬게 해줬어야 했다.

`새 정치`를 외친 오늘의 여야는 과연 그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까? 이명박 대통령이`대운하`에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진영논리의 정치적 계산서를 버리지 못하면 그마저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