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그리스 옛 수도 나프폴리오(Nafplio)

▲ 나프폴리오(Nafplio) 전경.

그리스 음식에는 올리브가 빠지지 않는다. 그런 만큼 올리브를 많이 재배한다. 나라에 등록된 올리브 나무 그루수도 1억 7천만 그루 쯤 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올리브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다. 그 다음이 그리스다. 그리스 신화에서 올리브 나무는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이 인간 세계에 준 귀한 선물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앞 바위에서도 열매를 맺은 올리브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우리 일행이 찾아가는 나프폴리오(Nafplio)행 길 곁으로도 올리브가 한여름 땡볕 밑에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그리스 여행 시작 한 주가 넘는데 그 사이 빗방울은 한 방울도 만날 수 없었다. 폭염, 건조한 날씨에도 올리브는 신기할 정도로 잘 자란다. 올리브 나무의 뿌리를 캐보면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뻗었을 것 같다. 건조한 날씨에도 고사되지 않고 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뿌리를 깊게 뻗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 서편 하늘로 두꺼운 구름이 뭉쳐 있다. 어쩌면 오늘은 빗방울을 만날 것 같다.

신화에 따르면 나프폴리오는 포세이돈의 아들 나프폴리오스가 세운 항구다. 그런데 아테네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신화의 한 배경이었던 이곳 나프폴리오가 수도였다. 그리스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할 필요는 없지만 그 이유를 짧게 밝히자면 두꺼운 역사책을 넘겨야 한다.
 

▲ 나프폴리오 해수욕장.

그리스는 1453년부터 약 400년간의 오스만 튀르크(현재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814년 그리스 독립당이 생기고, 1821년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1822년 1월 에피다우로스에서 독립을 선포한다. 튀르크와 이집트 연합군이 그리스 독립을 방해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 세 나라가 연합하여 이를 물리친다.

1829년 튀르크는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고, 1830년 런던회의에서 그리스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다.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 독립을 찾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습이다. 웃기는 일 같지만 1829년 독립한 그리스의 초대 대통령은 러시아 외상 카포디스트리아스(1776-1831)가 맡게 된다. 세 연합국의 승리에서 그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1831년 반정부단체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나프폴리오 `아기오스 스피리돈`교회에는 암살될 때 생긴 총알구멍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이런 시기에 그리스는 1829년부터 1834년까지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독립 후 나프폴리오를 첫 수도로 삼는다.

나프폴리오는 참 아름답다.

과거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도시로 이름 자체에서 보듯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도시 동편으로 해발 216미터의 팔라미디(Palamidi) 요새가 있다. 우린 나프폴리오에 들어서며 처음으로 팔라미디 요새에 올랐다. 정상까지의 계단이 999개란다. 중턱에서 나프폴리오를 내려본 후 바닷가 카페에서 그야말로 모처럼 여유를 갖고 차 한 잔 하기로 했다.
 

▲ 팔라미디 요새.

팔라미디 요새는 1714년 베네치아 사람이 지었는데 성채를 쌓은 지 3일 만에 튀르크 군에 함락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성이다. 반면에 19세기 초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에는 15개월 동안이나 튀르크 군이 포위를 했어도 함락되지 않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팔라미디 요새에서 내려다본 해안선은 한 폭의 그림처럼 색상이 선명하다. 우리는 성채에서 주황 기와를 아름답게 입힌 나프폴리오 마을과 그 안쪽의 푸른 바다, 그리고 바다에 건축한 브르치(Bourtzi) 요새를 감상했다. 아무래도 감상이란 단어가 `바라봤다`, `내려봤다`란 말보다 어울릴 것 같은 위치의 풍경이다. 모든 풍경이 달력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멋진 해외 모습으로 환상적이다.

견고한 성채는 오래 전에 쌓은 즉 미케네 성과 같은 축성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어 정교하여 아름답다. 돌을 직육면체로 크고 작게 깎아서 성을 쌓았다. 그곳에서 한참 머물렀던 우리는 해변 길을 따라 카페 촌까지 걷기로 했다. 걸어가는 오른쪽으로 아크로나필리아 요새(Akronafplia Fortress)가 있다. 팔라미디 요새와 아크로나필리아 요새 사이 뚫린 좌측 길을 따라 내려가니 해수욕장이다.

바다 서편의 구름에 비해 이곳은 아직 햇살이 쌓인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햇살 아래 해수욕을 한다. 모래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잔돌만 해수욕장에 깔려있는 것 같다. 그리 넓은 해수욕장은 아니다. 좁은 해수욕장에 몸을 길게 눕히고 일광욕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도시 곁에 낮은 산과 해수욕장과 멋진 산책로가 있다는 것은 시민들에게 축복이다.

사진 몇 장을 더 찍기 위해 일행들과 떨어져 천천히 걷는다. 해수욕하는 사람들 사이 들어가 나도 바닷물에 풍덩 몸을 담그고 싶다. 하지만 맘뿐이다. 휴양지를 찾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바다에 건축한 브르치(Bourtzi) 요새.

해수욕장을 지나 가파른 아크로나필리아 요새 왼편 바닷가 길을 걷는다. 암벽에 선인장이 무더기무더기 열매를 달고 있다. 선인장 열매를 맛보려 열매를 살며시 당겨본다. 잔가시만 손에 박힌다. 오기가 생긴다.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으로 열매를 포장하듯 싸서 당겨본다. 간신히 따서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입에 넣자 달콤하다.

어디였던가, 시장에서 선인장 열매를 사 먹으려 했던 것이?

그 때 바다 저쪽으로 번개가 번쩍인다. 이미 검은 구름은 바다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밀려왔다. 정말 오늘은 비 맛을 볼 것 같다.

500여 미터 거리의 해변 길을 걸으며 되돌아보니 팔라미디 요새가 영화 속의 한 배경처럼 높게 서 있다. 온통 바위로 형성된 산이다. 중간중간 선인장과 잔나무들이 철조망처럼 둘러싸여 있다.
 

▲ 소철나무 가로수.

산책로를 뚫기 위해 제법 돈을 투자했을 것 같다. 바위 위에 길을 내기 위해 조각낸 돌을 수평으로 깔았다. 해변 길 중간 굴처럼 생긴 바위 사이로 지나면 길은 급하게 꺾인다. 커브 길에 세워진 등대를 지나자 위령탑이 보인다.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면 종종 만날 수 있는 조형물이다. 객사(교통사고 등)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탑처럼 조형물을 만들고 상부 공간에 수호성인의 성화와 초를 넣어 가족이든,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카페가 이어진 주거지에 도착하자 아름드리 소철이 가로수로 서서 나를 반긴다. 팔라미디 요새에서 내려보던 브르치 요새가 눈높이 저쪽으로 보인다. 베네치아군이 터키군을 막기 위해 세운 요새다. 뭍에서 약 60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는 섬으로 1930년까지 사형집행인들이 은퇴 후에 살았던 곳이다.
 

▲ 나프폴리오(Nafplio)행 길 옆의 올리브.

카페 거리 앞쪽엔 크루즈 투어 안내판도 있다. 당일치기다. 그곳에서 출발하고 되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의 먹구름과 드센 파도로 생략하고 카페로 향한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번개와 천둥소리도 요란하다. 불꽃놀이 하듯 바다 저쪽으로 번갯불이 연이어 떨어진다. 더위는 한풀 꺾였다. 올리브 나무들은 이 빗방울에 맘껏 춤을 출 것이다.

카페 실외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일행들이 나를 보며 실내로 들어가자고 한다. 그 때 바다에서 배 한 척이 거센 파도를 무릅쓰고 출항한다. 두렵지 않을까? 출항하지 않는 배는 배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 팔라미디 요새에서 카페촌을 가는 해변길 .

사람 역시 여행을 통해 자아를 재발견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힘을 충전한다.

비는 소나기로 잠시 쏟아지고 말 것이다. 그리스 커피 한 잔을 추가한다. 여행하며 있었던 일을 웃어가며 나눈다. `하하하…. 허허허…. 호호호….`

늘 이런 풍경으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으랴. 세상은 저 바다처럼 잔잔할 때도, 거셀 때도 있음을 발견한다. 서로 소중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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