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장상(王侯將相) 부럽지 않은 인재의 터전
파평 윤씨, 기계 유씨, 영산·영월 신씨 시조묘 명당으로 손꼽혀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문신 목은 이색 등 숱한 인재 배출

▲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에 자리잡은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의 묘소에서 지난 11월 14일 열린 추향제에는 전국에서 500여명의 후손들이 운집했다.

외세의 위세 앞에 시시각각 허물어져 가던 19세기말 조선의 민중들에게 `후천개벽 해원상생`(後天開闢 解寃相生)의 희망을 전파한 강증산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어디 있느냐`며 앞으로는 이 골목 저 거리에서 평범한 이들도 입신양명하는 시대가 올 것을 예언했다. 그의 평등한 인재관을 고려한다면 8도를 뒤져 정·재계의 유명인사들을 앞세워 인재의 고장임을 알리는 저작 또는 보도는 견강부회의 우를 범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작 밭고랑 정기를 타고 났더라도 삶과 역사의 당당한 주역으로서 가족과 공동체의 의무와 책임에 주저하지 않았더라면 이 땅의 그 어느 누구도 `장삼이사`(張三李四)라고 쉽게 부를 수는 없다.

경북동해안은 큰 족적을 남겼든, 별똥별처럼 명멸한 삶이었든, 다양한 이들의 땀과 눈물 속에 역사의 바퀴를 굴려 왔다.

글 싣는 순서
<4부=역동적 삶의 터전, 경북동해안>

21) 모여서 되찾는 삶의 의욕- 민속
22) 바다로 달려간 밥상- 음식
23) 구비 마다 세겨진 인물 이야기
24) 부활하는 연오랑 세오녀
25) 변방의 부활은 창대할지니- 에필로그

세 성씨의 시조묘, 삼태사(三太師)
포항시 북구 기계면에는 파평 윤씨, 기계 유씨, 영산·영월 신씨 등 세 성씨의 시조묘를 일컫는 삼태사(三太師)가 있다.

이 가운데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 공신인 윤신달의 묘소인 윤태사를 모시는 봉강재는 봉계리에 위치해 있으며 해마다 음력 10월1일 추향제가 열리면 전국에서 400~500여명의 후손이 운집한다. 윤신달 장군의 현손인 윤관은 고려 선종 당시 1107년 여진정벌 원수(元帥)가 돼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와 영주 등 9곳에 동북 9성을 쌓고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했다.

삼태사 가운데 윤태사는 풍수학자들에게 명당으로 손꼽히고 있어 특히 봄과 가을에는 전국 각지에서 답사여행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고승(高僧)이 개척한 정신문화
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로서 원효를 비롯한 고승이 배출된 불교 정신문화의 땅이었다. 해안선을 함께 한 포항과 영덕, 울진도 원진국사와 나옹화상, 공민왕대의 국사 배천희 등에 이어 현대에 와서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에 법맥이 이어졌다. 원진국사는 고려 명종 당시 화염경과 인심종을 품계해 이름을 떨치고 청하 보경사 주지를 맡기도 했다. 배천희는 흥해 출신으로 공민왕 당시 국사(國師)로 책봉돼 출생지인 흥해현이 흥해군으로 승격될 만큼 고려말 불교계의 거성이었으며 현재 묘소가 흥해읍 양백리 뒷산에 남아 있다. 조선조 영조대 장기 출신인 남파대사는 어린나이에 승과에 급제해 대사에 이르러 밀양 표충사 수호도총섭을 지냈다.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은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에서 출생해 원나라에 유학한 고려말의 고승이다. 울진군 원남면 금매1리에서 출생한 양성법사는 조선 인현왕후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충의의 인물들
포항시 남구 오천읍민은 스스로를 `충의의 고장 사람`이라며 자부하고 있는데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가 이 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시호인 문충은 지금 문충리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수월재 김현룡은 연일현 출신으로 임란이 발발하자 친동생, 사촌동생들과 의병을 일으켜 화왕성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웠다. 남구 장기면 서학리 출신인 이대임은 임란 때 오성팔현의 위패를 석굴에 봉안한 뒤 의병을 모집해 경주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경주 출신 이장손은 화포장으로 임란 시 비격진천뢰를 만들어 경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팽수는 무과에 합격한 뒤 여러 고을에 왜구의 침탈이 심하자 서생포에서 접전을 벌여 장렬히 죽었다. 영덕 평해 출신인 손휴는 고려 예부상서로 이조혁명에 굽히지 않았다.

최시창은 세종 때 삼군도진무사로서 육신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돼 아들 면과 함께 순절했다. 힘이 센 장사였던 장대룡은 인조 때 훈련원 판관으로 삼척포첨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국치 후에 청나라 왕을 암살하고자 심양에 잠입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화약고에 방화해 분사했다.

▲ 파평 윤씨 시조묘와 봉강재 진입로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이색과 유척기 등 문신
고려말의 문신 목은 이색은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외가에서 출생했다. 문과에 급제한 뒤 1353년 원나라로 건너가 향시와 정동행성의 향시에서 1등으로 합격해 관리생활을 할 만큼 특출했다. 귀국 후 1367년 대사성, 1373년 한산군으로 봉해지고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포항 기계 출신인 유척기는 문과 급제 후 서장관으로서 북경에 다녀온 뒤 사화가 일어나 홍원에 유배됐다가 11년만에 중임돼 우의정과 영의정에 이르렀다.

필공(筆工) 이호익
이호익은 1882년(고종 19년) 12월20일 울진군 북면 주인2리에서 출생해 수공으로 붓을 만들어 울진은 물론 영동에 까지 붓의 우수성이 알려졌다. 1948년 영양에 사는 정씨가 찾아와 붓을 만드는 법을 전수했으며 1951년 2월 이호익이 사망하자 정씨는 상경해 서울 인사동에서 유명한 성문당필방을 운영했다. 하지만 우리 고장에서는 후계자가 한사람도 배출되지 못했다. 이필공의 붓은 삼통필, 양통필이 특히 유명했다고 한다. 이호익의 덕택이었는지 당시 울진의 선비가 붓글씨를 잘 쓴다는 평판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근 영덕에서는 주열, 김하구, 김의봉, 송대만 등이 명필로 알려져 있다.

기인(奇人) 권달삼의 이야기
본명이 천만인 권달삼은 1881년 안동에서 태어나 어릴 때 포항 흥해읍 옥성리 56번지로 이주했다가 다시 남성리로 옮겨 살았다.

포항시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기인으로 명성을 가진 봉이 김선달, 하원 정수동에 버금가는 우리 고장의 해학자로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재치와 기지, 임기응변으로 숱한 일화를 남겨 삶에 찌든 뭇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또 촌철살인의 독설과 풍자로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 이 지방에는 그의 재담과 유창한 화술로 인해 `산에는 산삼, 바다에는 해삼, 육지에는 달삼`이란 속설이 전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 동국 18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회재 이언적 선생이 유람하고 지은 칠언절구의 시비가 세워진 장기면 계원2리 소봉대.

북한 인민부력부장 오진우 `포항 장기 고향설`의 진실
오진우와 닮았던 창지리 주민 오주락씨
가족의 월북으로 평생 곤욕 치르다 사망

한때 포항 일대에서는 북한 인민부력부장을 지내다 사망한 오진우가 남구 장기면 출신이라는 소문이 제법 근거를 갖춘 채 나돈 적이 있었다.

이 소문은 지난 1970년대 후반 장기면에도 텔레비전이 일반화되면서 오진우의 얼굴이 창지리 주민 오주락(가명)과 너무 닮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구체적으로 `장기면 학곡리에서 태어난 오진우는 일제 때 만주로 떠나 포목상으로 돈을 벌어 김일성에게 군자금을 대어 일등공신이 됐다. 현재까지 창지리에는 친동생과 친척들이 살고 있으며 한국전쟁 때 인민군 장교로 경주 안강 인근에 왔던 그는 장기 쪽을 가리키며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70년대 장기면 모포리 쪽으로 간첩선이 많이 침투한 것도 오진우가 이 곳 지형을 잘 알기 때문이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대구지검 포항지청에 근무하는 이상준 향토사학자가 관심을 갖게 됐으며 확인한 결과 신빙성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주락의 형인 오주승은 좌익사상에 경도돼 1952년 인민군이 약세에 몰리자 인민군 함정을 이용해 학곡리에 살던 가족을 월북시켰다. 그때 끝내 월북하지 않고 남은 동생이 오주락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 오씨는 연좌제로 인해 정보 당국의 사찰을 받았으며 집안 사람들도 공직에 진출할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어려운 삶을 살던 오씨는 지난 1992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장기면 창지리 본가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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