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동해안서 창시돼 전국으로 퍼져나간 동학

▲ 경주시 외곽에 자리 잡은 구미산 자락의 용담정은 천도교 최고의 성지로서 수운 최제우는 1860년 4월5일 시천주를 깨닫고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게 된다.

경북의 혼(魂)을 밝혀보는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클로즈업되는 사상(思想)은 동학(東學)이다. 올해는 동학이 창도된 지 152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 근대 태동기 사회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집권층과 지도층은 무기력했다. 계층 간의 갈등은 깊어만 갔고, 사회구조의 변동과 향촌 질서의 변화는 사회 변혁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인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여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경북동해안은 우리나라 사회변혁의 큰 획을 그은 역사적 현장이다.

글 싣는 순서

<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
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
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
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
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동학
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

□수운 최제우와 동학의 교리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는 순조 24년(1824) 10월18일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비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성장해 가면서 당시 왕조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기성적 가치관이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삶을 구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나섰다. 이 구도의 길에서 민중을 구제할 수 있는 새길을 찾은 것이 동학(東學)이었던 것이다. 수운 선생의 원 이름은 제우(濟愚)가 아니었다. 원래 `제선(濟宣)`이란 이름을 `우민을 고난에서 구제한다`는 뜻으로 `제우(濟愚)`라 개명했다.

최제우는 서양에서 침투해오는 서학에 대한 대항의식으로 우리 민족도 한울님인 천주의 천도(天道)를 깨우쳐서 다시 민족부흥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한다는 신념에서 자신의 `천도`를 동학이라 했다. 모든 사람이 신분차별 없이 시천주의 인간존엄 주체가 돼 성(誠)과 경(敬)의 덕을 닦으면 모두가 군자가 될 수 있다는 평민의 인간자존 의식을 깨우쳤다.

한편으로 그의 동학은 왕조사회의 쇠망을 대담하게 예언하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시대가 도래한다는 이상향을 제시하고 당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척왜양이(斥倭洋夷)`의 민족자주적 저항의식을 서민들의 마음 속에 불어넣었다.

왕조 해체기에 피지배층인 백성들에게 신흥종교로 탄생한 동학은 그 교세가 날로 커졌다. 이를 본 조정은 이 동학교문을 민중의 반란조직처럼 위험시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혐의를 씌워 교주 최제우를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최제우는 1864년 대구 장대에서 `사도(邪道)난정(政)`이란 죄목으로 순교하게 됐다. 민족자주, 인간존중, 만민평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민본주의사상은 그가 순교한 후 갖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나날이 번창해 갑오농민전쟁에서 3·1 독립운동에 이르는 우리나라 근대민족사의 정신적 주류가 됐다.

 

▲ 담정의 경내

□포항·경주에 남은 최수운의 유적

경주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 10㎞ 떨어진 곳에 있는 구미산(龜尾山) 자락에 천도교의 발상지 용담정(龍膽亭)이 자리잡고 있다. 구미산은 거북 구(龜)와 꼬리 미(尾)를 합해 `오랜 뒤끝`이라 해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장소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수운 대신사는 21세 때부터 도(道)를 얻고자 10년이라는 긴 구도(求道)의 여정(旅程)을 가지고 있어 전국에 전설처럼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포항시 남구 구룡포에도 이와 관련된 유적이라 전하는 곳이 있다. 구룡포 후동리(厚洞里) 남쪽 산아래 마을에 불성사(佛聖寺)란 절이 있다. 마을 뒷산에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불을 켜` 놓고 기도를 한다고 해 `불썬바우`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는데 원효대사와 최제우가 이 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한다.

1859(己未)년 10월에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서도 그의 기도는 계속되다가 경신년(1860) 4월5일 밤에 드디어 하느님의 계시를 받게 됐다. 이후 수운 대신사는 양산 천성산 내원암(內院庵), 또는 적멸굴(寂滅窟) 등지에서 49일 기도를 수행했고 마침내 고향인 경주 현곡면 구미산에 위치한 용담정에 돌아오게 된다. 용담정은 수운 대신사의 부친(최옥)이 학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수운 선생은 `불출산외(不出山外)`라는 네글자를 문 위에 써 붙이고 `여기서 도를 깨닫지 못하면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라는 굳은 맹세를 했다. 수도에 전념한지 6개월 만에 그는 `한울님이 사람의 몸에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侍天主)`를 깨닫게 된다. 그 날이 바로 수운(최제우) 대신사가 무극대도를 받은 1860년 4월5일이다. 이와같이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은 장소인 `용담정`을 천도교에서는 최고의 성지로 꼽고 있다. 그러나 수운 대신사 순도 이후 용담정은 방치돼 왔다. 그후 중건과 퇴락을 거듭하던 용담정은 1974년 경주국립공원에 편입됨으로써 성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고 천도교인의 성금으로 1975년 오늘의 모습을 갖춘 용담정을 준공했다.

 

▲ 경주 황성공원에 건립돼 있는 해월 최시형의 동상

□ 포항에 은거한 해월 최시형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선생의 동상은 황성공원에 세워져 그가 태어난 황오동을 향해 있다. 그는 최치원의 후손으로 토박이 경주 사람이다. 초명은 경상이고, 호는 해월(海月)이다. 해월 선생은 청년이 돼 동학을 알게 됐고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이어 받은 뒤 평생을 숨어 살며 동학 사상의 기반을 닦고 키워나간 불굴의 혁명아였다. 선생은 심한 탄압 속에서도 포교활동을 통해 교세를 확장하면서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했다. 동학을 크게 성장시킨 선생은 교조신원운동과 갑오농민전쟁에도 참여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해월 선생은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7세에 현재 포항시 북구 흥해읍 신광면 기일동에 있었던 조지소(造紙所)의 고용공이 되었다. 19세에 밀양 손씨를 맞아 결혼한 뒤 처가가 있는 흥해에서 살았다. 그는 용담정에 있었던 수운 선생이 은거해있을 집을 주선해 흥해 매곡리(지금의 매산리) 손봉조라는 신도의 집을 소개했다. 해월은 현 포항시 신광면 마북리의 검곡(속칭 금등곡)에 살았다. 이때 수운선생은 접주제를 확립하고 16개 지역의 접주를 임명했는데 경주, 영덕, 영해, 영양, 청하, 연일, 장기 등 현재의 경북 동해안 지역이 모두 포함됐다.

28세 때 마북에 이사해 농사짓던 최시형은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6년동안 소임을 수행했는데 일을 잘 처리해 마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해월은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철종 12년(1861) 6월 37세 때에 동학에 입교했다. 한달에 3~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설교를 듣고 의범(儀範)을 배웠으며 집에 있을 때는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기에 힘써 하늘의 소리를 듣는 등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체험했다고 한다. 1875년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는 데 있으니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며 이름을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한 뒤 1898년 3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했다.

 

▲ 용담정 입구의 모습.

□ 영덕 이필제의 난

1871년 음력 3월10일(교조 최제우의 순교일) 영덕군 창수면(옛 영해부 서면) 신기2리(우정동) 병풍바위에서 전국의 동학인 600여명이 모여 천제를 지내고 횃불과 죽창을 들고 영해부성에 입성한 뒤 부사를 처단하는 일이 일어났다. 영해부 입성을 성공한 다음날 오후 동학교도들은 자진 철수했다.

이 사실은 갑오농민전쟁보다 23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여기에는 해월 선생이 참가하고 이필제가 선봉이 됐다. 관변기록의 참가자수가 600여명이니 실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 이것은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농민군이 대규모로 거병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 후 관군의 대대적인 탄압이 계속돼 참가했던 50여명이 체포돼 죽임을 당하고 이필제는 그 해 8월 문경에서 열린 유생들의 모임에 갔다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뒤 지금의 서울시청 뒤 무교동에서 처형됐다.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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