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

사상이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보통 사람들은 주눅부터 들어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다. 체계와 논리를 정연히 갖춘 거창한 정신세계가 사상이라고 생각해온 오랜 통념이 그 모양으로 만든다. 헤켈, 칸트, 니체, 하이데거, 주자, 왕양명 같은 동서의 고명한 이름들까지 떠올리게 되면, 그만 스스로가 한없이 왜소해 보이고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통념이다. 사상을 그런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상이 무언지 모르거나 사상을 너무 현학적으로 맹신해온 탓이다. 사상은 우리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고원(高遠)한 무엇`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학적이고 고원한 정신세계가 체계와 논리까지 겸비했다면 그것이 사상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런 정신세계만이 사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사회에서 사상이 존립하게 된 원래의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상이란 원래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올바른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게 하는 힘`이었다.

인간사회에서 사상의 존재이유가 올바른 생각의 나침반이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위대한 학자의 `위대한 사상`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의 삶과 행동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한낱 `화려하고 찬란한 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성립시켜 준다. 심하게 말하는 철학자들은, 우리의 올바른 삶과 행동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상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삶을 위한 사상도 아니고 행동을 위한 사상도 아닌 사상, 그러니까 사상을 위한 사상, 한마디로 말해 그 `순수사상`은 각박하고 절박한 현실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한가하고 고고한 학자`의 지적 유희(遊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사상이 인간에 꼭 필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삶의 지향점을 제시해주고, 그것을 위한 행동의 힘이 되는 것이다. 삶의 지향점을 상실한 인간, 올바른 행동을 상실한 인간의 보편적 특징은 그 사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타인에게 엄청난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주는 것도 어떤 인간의 특이한 사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을 우리는 쉽게 `사이코`라 일컫는다. 원래 사상의 존재 이유는 올바른 생각과 그 실천에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다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상을 갖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꼭 참고해야 할 하나의 조사 결과가 있다. 지난해 이맘때쯤 한국 갤럽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물질주의(물질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가장 중시하는 것)가 미국인보다 3배나 높고, 일본인보다 2배나 높다고 했다. 물질주의를 쉬운 말로 바꾸면 “돈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가장 중시하며 자기의 개인적 이익추구를 절대적으로 제일 먼저 추구하는 것”이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개인적 이익추구를 사상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사회인데, 개인적 이익의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일수록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이 `인간사회에 존재해야만 하는 바로 그 사상`이다. 그 `사상`만이 각박함을 풀어줄 수 있는 개인적 차원의 묘수인 동시에 `가장 소중한 사회자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는 사회적·시대적 차원의 그 `사상`이 맥을 못 추고있다. 그 `사상`이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우국지사`가 나오는 형편이다. `돈벌이`에서 대박을 터뜨린 `스타`들이 마치 `한국사회의 사상적 전범(典範)`으로 군림하고 있다. `돈벌이`에서 대박을 터뜨리지 못하면 `스타`가 될 수도 없고, 스타가 못 되면 일약 혜성과 같은 정치인으로 등장할 수도 없는 사회구조로 굳어져가고 있다.

`사상`이 맥을 못 추거나 실종된 그 자리에 강림해 계시는 물신주의, 이것이 바로 물신사회이고, 각박한 사회이고, 자살률 높은 사회이다. 지금, 우리는 너나없이 물신의 그물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