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

지난 여름 경주 금장대(藏臺, 한옥단청누각 154㎡)가 준공됐다. 강변도로를 달리던 사람들이 차를 세워두고 다시 보고 갈만큼 명소가 됐다.

신라 사람들은 질 좋은 돌(화강암)에 서원할 내용을 쓰고, 성스러운 산마루에 세우거나 묻었다. 1935년 경주보통학교(계림초등학교 전신) 교장과 경주 고적보존회(국립 경주박물관) 회장을 지낸 오사까 긴따로(大阪金太郞)가 금장낙조로 이름난 이곳 나들이에서 글씨가 음각된 비석을 주웠다.

글자를 판독해 보니 신라의 두 청년이 “임신년 6월 두 사람은 하늘에 맹세한다. 3년 동안 나라에 충성하고 큰 일이 없기를 빌며,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하늘이 큰 벌을 내려도 감수하고, 난세가 되더라도 이 약속은 지킬 것”을 서원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었다. 신라인들의 희귀한 정신문화재다.

금장대는 신라의 영산(靈山)이다. 산 밑에는 남천·북천·서천 물이 모아지는 여울목이 있고, 산꼭대기에 오르면 신라 오악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1976년에 발견된 암각화(방패·고깔·나무 잎)로 보면 선사시대부터 경주인들의 삶과 내세가 연결되는 성스러운 곳이 됐다.

근세에 들어서는 김동리를 세상에 드러내게 한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되어서 더 유명해 졌다.

-모화 집 마당에는 예년과 다름없이 잡풀이 엉기고, 늙은 개구리와 지렁이들이 그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거의 굿을 나가지 않고, 매일 그 찌그러져가는 묵은 기와집, 잡초 속에서 혼자서 징 꽹과리만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화가 인제 아주 미친 것이라 하였다. 그녀는 다만 “우리 아들을 예수 귀신이 잡아갔소”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까운 모화 굿을 언제 또 볼꼬?” 사람들이 모화를 아주 실신한 사람으로 치고 이렇게 아까워하곤 했다. 이러할 즈음에 모화의 마지막 굿이 열린다는 소문이 났다. 읍내 어느 부잣집 며느리가 `예기소`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녀는 “흥, 예수 귀신이 진짠가 신령님이 진짠가 두고 보자” 이렇게 장담했다. 굿이 열린 백사장 서북쪽으로는 검푸른 소물이 깊이 비밀과 원한을 품은 채 조용히 굽이돌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화는 김씨 부인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사연을 한참씩 넋두리 하다가는 전악들의 젓대, 피리, 해금에 맞추어 춤을 덩실거렸다. 밤중이 되어서였다. 혼백이 건져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랑이들과 작은 무당들이 몇 번이나 초망자(招亡者) 줄에 밥그릇을 달아 물속에 던져도 밥그릇 속에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김씨가 초혼에 응하질 않는 모양이라 했다.

모화는 조금도 서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넋대를 잡고 물가로 들어섰다. “일어나소 일어나소, 서른세 살 월성 김씨 대주부인, 방성으로 태어날 때 칠성에 복을 빌어” 모화는 넋대로 물을 휘저으며 진정 목이 멘 소리로 혼백을 불렀다. “삼단머리 흐트러져 물귀신이 되단 말가” 모화는 넋 대를 따라 점점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옷이 물에 젖어 한 가락 몸에 휘감기고, 한 자락 물에 떠서 나부꼈다. 검은 물은 그녀의 허리를 잠그고 점점 부풀어 오른다…. 그녀는 차츰 목소리가 멀어지며 넋두리도 허황해지기 시작했다. 모화의 몸은 그 넋두리와 함께 물속에 아주 잠겨져 버렸다.(김동리 소설 `무녀도` 중 예기소에서 굿하는 장면)-

무녀도는 김동리(金東里, 1943~1995)가 쓴 단편소설이다. 금장대(藏臺)는 신라 화랑세기에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기록이 된 것으로 봐서 그 때부터 애기소와 어우러진 금장대의 빼어난 배경으로 인해 신국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선비나 풍류객들이 짙푸른 소를 바라보며 시를 지은 곳이다. 특히 1450~1600년까지 많은 시인이 다녀간 흔적이 시가로 남아있다.

한옥누각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현판이다. 금장대 현판은 경주가 낳은 영남 명필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선생이 썼다. 현판글씨는 건물의 격(格)과 조성한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어 당대의 명필만이 붓을 잡기에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