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

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헛꿈을 많이들 꾼다. 자고 밥 먹고를 되풀이하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런 헛꿈을 꾸는 사람들로 세상이 채워지고, 자신의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몸을 던져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는 보통 삶으로만 채울 뿐이다.

몸을 던져 일상을 깨어버린 성철(1912~93) 스님의 구도열정은 위대하다. 이보다 더 위대한 분이 신라 혜초 스님이다.

21세기의 실크로드는 자동차로 달리고 비행기로 적당한 지점에 내려서 며칠 쉬었다가 갈 수도 있다. 중국 둔황에서 현대문명의 이기를 빌려 사막을 넘어도 온몸이 마르고 헉헉거리면서 며칠을 가도 사막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생의 삶이다.

먼저 간 구도자의 해골바가지가 나침반과 길 표준으로 삼았던 혜초는 해동 최초의 해외 여행가이자 진취적 선인(先人)이어서 지금처럼 사는 사람들은 접근조차 어려운 삶을 살았던 분이시다. 함께 배로 천축 땅을 밟았던 80명의 도반을 잃고, 당나라에 돌아온 신라 승이다.

혜초가 남긴 두루마리 여행기에 담긴 시는 국문학적 가사로서도 높이 평가 받는다. 혜초 등 구도자들이 걸은 길은 광활한 사막뿐이다.

정말 이 먼 세월, 살아남은 것은 오직 사막뿐이고, 살아있는 것은 지나가는 나그네일 것이다. 벌레는 전갈에게, 전갈은 나는 새에게 먹히고, 먹히는 모두가 죽을 운명에 처한 곳이 사막이다. 죽어 바짝 마른 빈껍데기가 되지만 이 세대가 가고나면 다음 사람이 오는 곳, 이것이 불변의 윤회 법칙이다.

사는 모습이 가지가지이듯 죽는 방법도 여기저기 이사람 저사람 그저 그렇게 보일뿐이지만 살아있는 것은 모두 떠나고 만다. 겸익(백제승으로 추정), 아발도, 법현, 현장, 혜초 스님도 지났을 땅이다. 숱한 세월동안 사람은 지나갔지만 결국 남는 것은 광활한 이 사막이다. 베푸는 나와 베풂을 받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同體慈悲)이 아니라 아낌없이 온몸을 던져 이 너른 땅을 지킨 사람들이다.

중국 둔황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거친 사막을 건너기에 앞서 여장을 점검하고 체력을 추스르는 마지막 주유소 같은 곳이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불법을 세운 땅(천축)이자 석굴사원으로 가는 머나먼 구법(求法)여행을 위해 수도승(修道僧)들은 둔황에 묵으면서 화엄학을 세상에 내놓은 해동 성사(聖師)원효의 `대승신기론소`를 암송하고, 무탈 여행을 염원했을 것이다.

타클라마칸은 위구르어로 `오래된 안식처`또는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하는 땅`이란 뜻이 담겨 있다. 너무 넓고 험한 사막, 동에서 서쪽으로, 서에서 동쪽으로 가든 목숨을 걸고 걸어야 하는 곳이다.

타클라마칸에서 자주 만나는 낙타는 영물. 이 낙타는 사막의 한 가운데서 내 등에 탄 사람을 흔들어 버리면 모래밭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물이다.

낙타를 부리는 위구르 사람들은 오아시스에 닿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고 심한 매질을 하고는 머리에 쓴 터번이나 모자를 던져주어 인간의 냄새를 기억하게 만든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어젯밤에 쌓인 낙타와의 원한을 씻을 먹이를 풍부하게 주어서 인간을 태우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이치를 알게 한다는 것.

물론 지금은 여행자를 멀지 않은 거리를 태워주고 생활비를 챙기고 있으니 예전과 같은 위험한 길은 없다.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세월을 두고 이들이 터득한 방법이다.

걷는 것은 희망을 주고,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힘들게 했던 순간들을 정리하는 방법이다. 걷기에 딱 좋은 계절이니 모든 걸 던져버리고 동네길이라도 걸으면서 자신을 정리해 볼 늦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