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실크로드 끝 `동서문화의 용광로`

▲ 실크로드 오아시스로를 걸어가는 대상(隊商).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까지 8천500km의 거리를 이동하는데 6~7개월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사마르칸트국 아프라시압 도성터 벽화에는 각국에서 모여든 사절단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이 가운데 황색 예복과 바지를 입고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을 비롯해 삼국 사신의 모습이 눈길을 끄는데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당영립왕회도, 이른바 왕회도로 불리는 작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근거는 삼국이 중국을 넘어 이른바 서역 국가들과도 교류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세력을 키운 후발주자의 한계를 넘어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유독 두 나라와 다른 독특한 대외관계를 펼쳐 나갔다. 고구려와 백제는 비교적 중국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신라는 초원의 길을 통해 중국 못지 않은 서역의 문물을 직접 수입했다.

글 싣는 순서

<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
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
12)연오랑세오녀, 태양신화와 문화자긍의 상징
13)항해와 조선의 脈은 이어져…
14)비단의 길은 서라벌에 닿아
15)신라의 달빛, 서역에 비치다

 

▲ `왕회도` 속 백제, 고구려, 신라의 사신.<왼쪽부터>

□ 동북아에 꽃핀 로마문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유리공예가 중 한사람인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67). 그는 지난 2002년 317쪽 분량에 원색 사진을 다량 수록한 `로마 문화의 왕국 - 新羅`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 날개표지의 광고 문구는 정작 역사의 당사자인 우리들이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단정을 내려 눈길을 끈다.

`고대사가 바뀐다! 동아시아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로마 문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라다! 출토유물과 신발견의 고대 기록사료 등, 실제 자료에 의해 신라의 수수께끼를 해명한다.`

저자는 삼국 중 경쟁 두 나라와 달리 중국을 우회해 로마 문화를 직수입하고 있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문물이 선진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갈파한다. 요시미즈는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 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초원(草原)의 길을 통해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다고 주장한다. 또 이런 흐름을 타고 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건들 뿐만 아니라 정신과 사고 등을 포함하는 로마 문화가 유입됐다는 것이다.

이후 476년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로마 식민지가 황폐됨으로써 문화 교류의 상대가 사라지면서 신라는 중국에 조공하고 중국의 문물을 적극 수입하게 됐다. 요시미즈는 신라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나오는 정의를 내림으로써 책의 끝을 맺는다.

`신라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당과 밀접한 교류를 함으로써 약소국이면서도 곧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통일했다. 소국 신라가 가졌던 이러한 반도통일의 에너지는 과거 로마 문화를 수용하던 시대에 쌓아 올려 중국 문화와는 다른 에너지를 잠재적으로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신라 예찬가 요시미즈가 관련 저작에 이르게 된 계기는 1974년 발굴된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에 대해 듣게 되면서 부터이다.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간 요시미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초상옥(肖像玉)으로서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라고 단정했다. 이후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로마의 액세서리가 전해진 경로를 연구해 신라가 로마문화의 왕국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인 상을 한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

□경주에서 발견되는 서역의 흔적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동 98호 남분 및 북분 등 경주 일대에 산재한 5~6세기 신라고분에서는 20~80여점의 각종 유리기구가 발굴됐다. 요시미즈가 격찬한 인면유리구슬인 `미소짓는 상감옥`을 비롯해 이들 유물은 4~5세기경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후 서역계 상인들에 의해 흑해와 남러시아에서 스텝로, 이른바 초원의 길과 해로를 통해 신라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인숙 경기도박물관 관장 등 학자들은 이들 로만 글래스의 직수입과 별도로 유리구슬용 진흙재(材) 틀 등 유리 제작 관련 유물들이 출토된 사례를 토대로 수입된 유리 원자재를 가공해 한국형 구슬도 제작됐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보석류로서는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지방에서 산출되던 슬슬(瑟瑟)과 호탄 일대의 옥이 서역상인들에 의해 신라에 까지 도입돼 사용됐다. 특히 일반적으로 에머랄드로 해석되는 슬슬은 귀족의 부인들로 부터 수요와 애착이 높아 급기야 법령이 공포돼 진골녀와 육두품 여자들의 빗 장식에 대한 사용이 금지되기에 이른다. 앞서 통일의 안정기조에 안주한 신라 귀족층은 7세기 문무왕 대를 전후해 수입품 등의 사치와 향락에 탐닉했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당시 신라 수도 금성은 풍요로운 당나라 장안 생활을 모방하려는 사치풍조와 무분별한 수입 개방으로 도시문화가 오염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결국 흥덕왕 9년(834년)에 사치외래품을 금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법령이 공포됐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양모로 짠 페르시아 카페트나 깔개 종류도 신라에 전해졌다. 삼국사기에는 문양 있는 모직 카페트나 모직 담요를 지칭하는 `구수`와 사찰이나 왕실의 상과 옥좌에 사용한 모직깔개인 `답` 등을 육두품이나 오두품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 기록이 나온다.

서역 상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해 신라와 고구려인들을 직접 접촉했다는 근거들도 확인된다.

7세기 중반의 경주 고분에서는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는 투르크계 중앙아시아인 형상의 토용이 여러 점 출토됐다. 또 일본서기에는 한반도의 삼국이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낙타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 사진 왼쪽: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7-8세기,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 사진 오른쪽: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로맨글래스 봉수병 (4세기)

□실크로드의 동쪽 끝 경주

실크로드는 동서문물의 교섭 루트로서 그 역할이 3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문명사는 사막의 길, 초원의 길, 바다의 길로 나뉘어진 실크로드를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동쪽 끝은 신라였다는 사실이 그동안 끊임 없이 근거를 확보해 왔다.

이희수 교수에 따르면 신라 절정기인 8세기에 실크로드를 통해 경주에 문화가 전파되는 속도는 1년 남짓이었다. 신라고승들이 새롭게 편찬되거나 소개된 불경들을 중국에서 구해보는데는 1개월여가 걸렸다.

평균 100마리의 낙타를 포함한 규모의 오아시스 캬라반이 20~30t의 화물을 싣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에 까지 이르는 시간은 6~7개월로 추정하고 있다. 8천500km에 이르는 거리를 하루 40km씩 이동할 경우 7개월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이희수 교수는 동서 실크로드를 관통하는 4대 도시를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압바스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 그리고 그 끝에 위치한 신라 수도 경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이탈리아의 첨단 패션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시스템처럼 천년전에도 첨단을 걷는 세계문화인식과 유행이 존재했다는 상상력에 이를 수 있다.

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신라 문화가 곧 한국 고대문화를 대표한다고 정의했다. 또 불국사나 석굴암과 같은 독창적인 문화적 총체를 배태할 수 있었던 역량은 여러 문화 요소를 축적하고 융합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경주 남산 일대에 존재하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문화유산도 신라인들의 개방성과 독창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신라의 1천년에 걸친 서역 선호 풍조는 차츰 퇴조했으며 중국 문화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서역과 직접 접촉하며 쌓은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기량은 한국의 저 빛나는 민족문화를 살찌우고 여전히 우리 핏속에 이어지고 있다. 경주는 아시아의 동쪽에서 세계와 교류하며 여러 문화를 자기화 해내는 용광로였으며 한반도에 세계의 도시, 국제도시를 구현해냈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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