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삼족오는 일월사상을 상징한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 조차 왕들의 정확한 대수를 정리하기 힘들었을 만큼 초기 신라왕실은 안정화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연은 `제8대 아달라왕 4년`이라며 자신있게 기록했다. 이는 운수납자 (雲水衲子)로 바람과 구름처럼 전국을 떠돈 승려였던 일연이 지금 포항 오천읍의 천년 고찰인 오어사(吾魚寺)에 머물렀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민속학자처럼 주민들로 부터 인근에 전해오는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듣고 취재했을 것이며 자신이 쓴 역작에서 첫 설화로 싣기에 이르렀다.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가 바다로 나가 해조류를 채취하다가 갑자기 바위가 그를 업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하길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다”라며 왕으로 세웠다(일본 제기帝紀를 살펴 보면 그 전후로 신라 사람이 왕이 된 자가 없으므로 이것은 변방 읍의 소왕이지 진짜 왕은 아닐 것이다). 세오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찾으러 갔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았는데 역시 그 바위에 오르자 그 바위가 또한 그녀를 싣고서 전처럼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뢰며 왕에게 바쳐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으니 일관이 아뢰길 “해와 달의 정기가 내려와 우리나라에 있었으나 지금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괴이한 일이 초래된 것입니다”하니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오도록 하였다. 연오가 말하길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짠 고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하면서 곧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고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해와 달이 그 전처럼 되니 그 비단을 어고에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 이름을 `귀비고`라고 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낸 장소 이름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3권 영일현조 김종직(金宗直)記`등을 인용한 `일월사적비`에 따르면 (포항의)일월지(日月池) 근처에 일월신을 모시는 천제당(또는 일월사당)이 있어 신라 때는 조정에서, 고려·조선 때는 영일현감이 친히 제사를 올리고 이 사당에 모신 신위를 일월신이라 부르고, 이 신위가 연오랑 세오녀 신위라고 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해병부대 내에 3천여평의 일월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매년 9월 중양절에 일월 제의를 행했으나 강점기 때 제단이 철거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