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대수`로 이어진 한·일 해상교류의 통로
영일만·오키섬, 경북동해안~日 기착지·고대문명 중계지
비옥한 농경지·풍부한 어염, 신라왕경 재화 제공처로

▲ 연오랑 세오녀를 비롯해 일본 등 외부와의 대외 교류를 위한 선박의 출입이 빈번했던 포항 영일만 일대를 북구 용한리 영일만항 상공에서 내려다본 항공사진.

고대의 연오랑세오녀에서 부터 시작해 신라의 대외 진출 해상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한반도의 해안선을 괴롭힌 왜구의 출몰, 근대사의 일제 수탈에 이르기까지 경북동해안은 일의대수(一衣帶水)로 이어진 일본과 끊임 없는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 과정에서 반도에서 대양으로 나아가는 도전정신과 진취성, 새 문물을 주고받는 주역으로서의 개방성을 체득해나갔다. 또 외적의 침략에는 변방의 전사로서 항쟁의 대열에 나서기도 했다. 본지는 기획특집 `경북의 혼` 제2부에서 문물 교류와 해양 진출의 교두보가 돼 온 경북동해안에 이어진 역사적 연원과 그 정체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
<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
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
12)도전의 시대 무역항로는 열리고
13)창해를 넘는 선박건조의 비밀-1
14)창해를 넘는 선박건조의 비밀-2
15)잊혀진 옛 항로- 1
16)잊혀진 옛 항로- 2
17)해양무역시대를 잉태하다

일의대수(一衣帶水)의 땅

흔히 한국과 중국, 일본의 관계, 특히 한일 간 애증의 역사를 거론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 `일의대수`이다.

어원은 중국의 역사서인 `남사(南史)`의 `진본기(陳本紀)`에서 찾을 수 있다. 수(隋)나라의 문제(文帝)가 진(陳)나라를 공격하면서 양국 사이를 흐르는 양쯔강(양자강)을 두고 한 말로서 `한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고 할 만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대한해협을 현해탄이라 하지만 그 폭이 넓지 않아 두 나라 정치인들이 의원 외교 석상에서 단골처럼 등장시키는 수식어가 돼 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일본과 마주 보고 선 경북동해안에게 연오랑 세오녀 대(代)에 꽃핀 대 일본 교류와 우호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으며 저항과 극복으로 점철됐다.

국내 연오랑 세오녀 연구는 주지하다시피 배용일 전 포항대 교수에 의해 새로운 지평들이 개척돼 왔다. 그의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등의 저작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까지도 영일만지역에는 `왜(倭) 가는 배 같다`라는 말이 전하고 있었다. 이는 배가 수십척씩 선단을 이뤄 지나가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오래전에도 일본과 해상로를 통한 이주와 교류가 얼마나 빈번하고 규모가 컸는지를 짐작케하는 비유인 것이다.

이처럼 지리적 여건과 항해의 역사적 배경으로 판단할 때 영일만과 인근의 경주, 영덕과 울진 등 경북동해안은 고대로부터 일본과 울릉도, 남해 등지와의 해상교류 통로가 돼 왔다. 특히 영일만과 가장 가까운 일본 지역은 거의 같은 위도인 북위 36도 상에 있는 오키섬과 이즈모, 마쓰에 등이다. 신라에서 이곳으로 가는 항로는 첫째 영일만-대마도-이키시마-하카다만-오키섬-이즈모 구간, 둘째 영일만-오키섬-이즈모 구간 등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지난 1999년 포항MBC의 보도에 따르면 영일만에서 해류를 이용해 실험을 한 결과 부유물이 두번째 해로를 통해 표류했으며 실제 우리 동해안의 각종 쓰레기가 오키섬의 구니가 해안으로 떠내려가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할 때 영일만 등 경북동해안과 일본 간 왕래의 기착지인 오키섬은 고대에 역사와 지리적으로 한국과 일본 문명을 이어주는 중계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필원잡기`와 `동국여지승람`의 문헌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자들도 오키섬이 한반도 이주민이 정착을 주도해 이룬 고장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풍부한 어염(魚鹽) 등 물산

본지는 지난 2009년 5월 11일 발견된 포항중성리신라비를 특종 보도함으로써 현존하는 최고 신라비로 인정받는데 한 역할을 한 바 있다. 중성리비의 존재가 확인되기 전에는 지난 1989년 4월 6일 발견된 영일냉수리신라비가 현존 최고 신라비로서 국보 264호로 지정됐다. 이 두 비석에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을 종합하면 재산 분쟁에 관련된 내용들이 확인되고 있다.

경북 동해안에서 재산 분쟁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재화가 이 지역에서 생산됐음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이 재화를 두고 여러 연구가 있지만 결국 동해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어염(魚鹽)과 해산물이 주요 대상이 됨을 알 수가 있다. 일찍이 고구려가 동예 지역의 어염 확보를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신라 또한 동해에서 생산된 물산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신라왕실 및 귀족들 간에 매우 첨예한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잘 알 수가 있다. 또 비옥하고 넓은 농경지에서 생산된 양곡도 신라 왕경에 상당한 재화를 제공했음을 각종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9년 10월 포항시청에서 열린 포항 중성리 신라비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에 실린 논의 경작 면적을 분석한 결과 경주가 약 1천70결, 포항이 약 1천36결로 나타났다. 고대부터 해안지역인 포항이 내륙인 신라의 수도 경주의 관문지역으로서 거의 비슷한 농지를 보유했다는 사실은 신라 국가와 귀족들의 재정 유지를 위한 최적의 인접 배후지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경주의 읍천항 일대는 다소 퇴락한 편이지만 인근에 감은사지와 대왕암 등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신라의 왕경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인 만큼 바닷길의 기점이기도 하다.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 정복

신라는 중고(中古)기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을 하며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동북방 진출은 동해안 연근해 해로를 최대한 활용하여 북방의 거점 확보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동해안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다. 신라는 이를 통해 최전방 군사기지에서 한반도 중부의 동해바다로 나가는 출항지를 확보해 우산국 정복의 기반을 구축했다. 왕실 출신 진골 귀족으로 유능한 이사부는 귀족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원하고 동해안 진출과 가야 정복 등 무인의 역할과 국사 편찬 등 문인의 역할로 신라가 후진의 열세를 극복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는 업적을 남겼다.

우산국은 당시 신라에 조공을 거부할 만큼 동해상에서 하나의 독립된 해상세력으로 상당한 위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와 왜와의 해상교통로 중간 경유지에 있는 우산국의 정복으로 신라는 양자의 교섭을 차단하는 이익을 확보했다. 이로써 신라는 동해의 중북부 해역을 무대로 하여 연해주로 부터 한반도 동해안, 일본 열도까지 포괄하는 관계 속에서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우산국을 정복할 당시 이사부 수군의 출항지에 대해 울진지역설, 강릉과 삼척 등 강원도지역설 등 이론이 있지만 현재 울릉도와 독도가 경상북도에 속한 만큼 별도의 언급은 생략한다.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