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

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장 임기를 막 끝낸 수필가 박원은 경주를 가장 잘 아는 고수이다. 경주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야가 없다. 그만큼 내공이 깊은 문학가다.

박원의 말을 빌리면 경주는 한국문학의 성지다. 일찍이 고대국가의 도읍지였으며, 반만년 역사의 뿌리가 되는 땅이자 우리문학의 싹을 틔운 정신문화의 고향으로, 밝은 얼굴과 핏줄의 뜨거움을 갖는 도시가 되었단다.

신라 향가 가운데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는 나라의 기강이 되는 정치적 원동력을 알게 했으며, `처용가`한 구절로써 그 시대 사회상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원앙생가`를 통해서는 시공을 초월하는 신라인들의 종교관을 이해할 수 있었고, `제망매가`에서는 높은 문학성을, `찬기파랑가`에 비친 화랑의 기개도 대단하지만 내면적 성찰은 오늘날까지도 교훈이 되었다. 이렇듯 `헌화가``혜성가``모죽지랑가`와 같은 현존하는 신라향가 14수는 우리민족의 DNA를 인식시켜주는 교과서적 경전이라는 해설을 달고 있다.

박원 선생은 김시습에도 빠져있다. 아마도 설잠의 방랑벽이 그를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의 사회적 정변을 뒤로 하고, 팔도를 유람했던 김시습의 내면세계나 박원 선생이 겪었던 부산일보 사회부기자, 언론사 사장 등 금전과는 늘 일정 거리를 두었던 산림처사(隱人)의 행장(行狀)으로 보면 질곡의 세월은 시대만 달랐을 뿐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설잠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

경주 수필가협회(회장 김형섭) 문우들과 더불어 서남산 용장사 산방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한 설잠 김시습의 문학행사를 여는 것이 또 하나의 소박한 꿈이다.

박원은 현대사를 발굴하는데도 내공이 깊다. 토함산 해맞이로 아침을 여는 동남산 작은 절집 옥룡암(玉龍菴)이 `청포도`의 산실이 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해 냈다. 민족적 저항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육사(陸史)가 시(詩)작에 몰두했던 시기, 수봉재단 설립자의 3세손인 이식우(경주고등학교 교장)선생과 당시 생불(生佛)로 추앙받았던 만석 스님이 주석했던 옥룡암에서 육사를 숨기고 후원했던 사실이 하마터면 역사에 영원히 묻힐 뻔 했다.

만석 스님으로 말하자면 성철, 청담, 경봉스님과 함께 일찍부터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화두(話頭)를 붙들고, 면벽수행을 했던 학덕 높은 선승이었다. 육사는 이 작은 절집, 비 새는 요사채 섬돌아래서 귀뚜리 울음을 벗 삼아 명시(名詩) `청포도`를 지었다. 육사의 병구완과 조섭을 도운 신석초(申石艸), 김범부(金凡父)의 얘기도 눈물이 가리는 시대의 아픔이다.

박원은 글씨를 보는데도 조예가 깊다. 8세기를 살았던 김생의 글씨는 당나라의 서예가 왕휘지를 앞섰다. 당시 당나라의 학자들은 김생의 글씨를 보고, 벼락 천둥이 치는 느낌을 한자 한자 삐침이 나오는 글 획에서 받았다고 하며, 글체가 얼마나 고졸하고 떨림을 주었던지 절을 올리고 보았다고들 한다.

이런 김생의 글체를 이은 분이 조선시대 후반기를 살은 추사다. 김생의 글씨는 실존하는 것을 보기 힘들지만 추사체를 보고 싶으면 옥룡암 작은 초당에 걸린 현판 `일로향각`을 보러 가면 된다.

이렇듯 경주 남산은 그가 가장 즐겨 찾는 곳이며, 삼화령에서 칠불암에 이르기까지 호흡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남산을 태백줄기의 마지막 자리로 보는 그는 많고 많은 유적에서 역사와 정신을 찾고, 문학의 터전으로 삼는다. 소나무와 잡목이 뒤엉킨 금오산의 품에서 오늘도 새 천년을 이어갈 문학을 찾는 이인(異人)이시다.

그가 꿈꾸는 한국문학의 성지작업이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더라도 여전히 문학을, 성지를 외칠 것이다. 신라인들의 통찰력 높았던 예술의 향기를 꿰차고 다니는 그가 있어 경주는 문학을 관광 경주의 브랜드적 가치로 접목시키는 그의 혜안(慧眼)대로 더 아름답게 빼어난 고도가 될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