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 겸 발행인

현판 글씨는 건물의 격(格)과 조성한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어 당대의 명필만이 쓴다.

지난 4일 준공식을 가진 경주 금장대(藏臺, 한옥단청누각 154㎡)의 현판글씨는 경주가 낳은 영남 명필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선생이 썼다. 심천 선생이 전서로 쓴 서쪽현판은 글 획에 실린 기운이 부족하고, 도로에서 볼 수 있는 동쪽 현판은 글씨가 작아 추석 전에 다시 써 달기로 결심,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심천 선생은 글자 한자 한자에 풍부한 근육과 단단한 뼈가 들어있고, 글 획들이 서로 어우러져 전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 흐르도록 이번엔 전서보다는 해행(楷行)체로 쓰기로 결심하고, 대 붓(마모필)을 다듬고 있다. 글자 한자 크기가 1m가 넘으니 금장대(藏臺)엔 폭 4m가 넘는 현판이 걸리게 됐다. 심천 선생은 금장대 현판을 새로 쓰기에 앞서 먼저 머릿속에서 글을 앉힐 자리와 천둥 벼락이 치는 느낌이 저절로 들도록 글 획의 삐침 자리까지 정하고서야 붓을 들겠다고 한다. 글 세자를 쓰는데 드는 먹물이 큰 사발로 한사발이나 되어서 먹을 가는데, 만 하루가 완전히 걸리니 작품의 크기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선생이 쏟는 마음은 선승이 쌓는 불심(佛心)같다.

심천 한영구 선생은 고희(古稀)전에 나온 보문품을 쓸 때도 이른 새벽 백률사로 오르는 사면석불을 찾아 관음보살 명호를 천 번이나 외치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부처를 현신하는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체는 마치 강철을 오려 놓은 듯 획이 곧고 강직한 흐름이 있는 반면 심천 서체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고 고졸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선생이 형산강의 발원지에서 태어나고 항상 경주를 가로질러 흐르는 형산강을 바라보면서 서체를 가다듬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금장대 같은 유명 건물의 현판글씨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글이어서 서예인이라면 누구나 꼭 쓰고 싶어 한다. 상량(上樑)문도 글은 한학자 조철제 선생이 짓고, 선생이 썼다. 금장대는 신라역사가 잠든 경주를 대표할 수 있는 정자여서 70평생 붓 한 자루로 외길을 걸은 심천 선생으로서도 영예스럽고, 현판자체가 또 하나의 경주 명물이 될 것이다.

권법(拳法)으로 유명한 중국 하남성 숭산 산문(山門)에 걸린 `소림사(小林寺)`란 현판도 지금 명물이 됐다. 어느 해 큰 불로 대웅전이 불타버리자 주지가 중창 불사를 일으켰다. 주지는 마지막 과정인 산문 현판을 만들기 위해서 빛깔이 좋고, 수령이 백년 넘은 자단목(紫檀木)을 구하긴 했는데, 글씨를 쓸 만한 마땅한 명필이 없었다. 마침 명필로 이름난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재를 지내러 절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지는 이 때다 싶어 황제가 오는 날 스님들을 산문 앞에 보내어 글을 쓰게 했다. 평복 차림의 강희제가 산문을 지나다 보니 스님들의 필력이 가관이었다. 삐뚤삐뚤하기도 하고, 짐승그림 같은 글씨를 보다 못한 강희제가 “지금 무얼 하십니까”하고 묻자 스님들이 “주지 스님 지시로 산문 현판 글씨를 쓰는데 권법연습하기보다 이건 더 힘들군요”하고 답했다. 황제는 스님으로부터 붓을 받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少林寺`라고 써 내려갔다. 강희제는 스님들의 꾀에 걸려 글을 쓴 것을 알아차렸지만 탓하지 않고, 옥새를 가져와 `림(林)`자 위에다 낙관을 했다. 이후 소림사 현판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보물이 되었다고 한다. (최종세 `중국 시·서·화 풍류담`에서)

전서로 쓴 경주 옥룡암 현판 `일로향각`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유배에서 풀려나 금석문에 빠졌을 시기에 암곡리 무장사 답사 언저리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쓴 은해사 현판이 주요 관람코스가 된 이치도 이와 같다.

심천 선생은 경주에 한· 중· 일 서예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공간이나 영남서예를 전승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만년에 가진 최고의 꿈이자 희망이라고 한다.

경주시가 석장동 동국대학교 부근에 구상하는 새 화랑 체험관(3만㎡)이 들어서면 서예인재들을 모아 영남서예의 맥을 잇도록 후학을 살피는 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