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종흠 시사칼럼니스트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예비후보는 2007년 대선예비후보 때와 꼭 같이 아버지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에 대한 평가문제로 논란에 휩싸여 있다. 이 문제는 박 후보가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괴롭힘의 유령이 될 수 있다. 박대통령 집권시기가 지나고도 한 세대의 역사가 흐른 지금까지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를 몰라서 박 후보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야당과 언론이 이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명분상 대선후보의 역사관을 검정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된 부분의 역사를 박 후보에게 덧씌우려는 대선의 이해득실이 깔려 있음을 누구든 다 알고 있다. 물론 박 대통령 당시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지금까지 박 대통령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도 당사자가 아닌 2세인 그 딸에게 계속 그같은 덧씌움이 계속되는 것이 온당한지는 심각하게 따져볼 일이다.

이 문제는 대체로 5·16과 박 대통령의 집권기간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 주역인 박 대통령 시해사건, 박근혜 후보와 5·16 연좌문제 등을 짚어보면 지금 다시 불거지고 있는 5·16논란이 객관적으로 정리될 것 같다.

이미 5·16은 6월항쟁 이후 개정된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이 4·19혁명정신을 계승한다고 못박고 있는 점에서 4·19민주혁명으로 수립된 장면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킨 분명한 군사 쿠데타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집권기간에 산업화와 근대화의 기반을 확립했다는 것은 과거 박대통령의 정적이었던 김대중 대통령까지 이를 인정했던 것이고, 박 대통령이 쿠데타 이후 세 차례의 선거를 통해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던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후 월남 패망 등 국제정세의 급변 등으로 친위 쿠데타 성격의 유신을 단행함으로써 정통성을 다시 훼손한 결과 부마항쟁 등 국민적 저항과 10·26시해로 정권의 종말과 일신의 불행을 맞이한 것이다. 이같은 박 대통령의 집권과 치적에 대해 현실 정치권에 이해 당사자가 남아있는 한 객관적 입장의 역사적 평가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사후 한 세대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에 대한 국민의 인정도가 계속 상위권에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치적은 과보다 공이 크다고 판단하는 국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공이 크다고 해서 쿠데타가 미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 감안해야 할 것은 당시는 건국 이후 민주화와 산업화의 측면에서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지 못한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산업화의 기반을 확립했고, 그것이 나중에 민주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결코 박대통령의 유산을 버릴 수 없다. 민주화 이후 다시 쿠데타 세력이 들어설 수 없는 현 단계에선 산업화와 근대화는 함께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유산인 것이다. 그러나 정통성을 훼손했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 저항과 본인의 불행으로 막을 내린 유신과 그 뒤 6월 항쟁으로 이룩한 민주화로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박 후보의 5·16 연좌문제는 이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 내려진 국민의 심판으로 해소된 측면이 크다. 혹시나 박 후보의 역사관속에 미래의 쿠데타 세력에 지지를 보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상식선을 넘는 판단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몇 차례나 민주방식의 선거에 참여하고 지난 대선에선 경선패배를 깨끗이 승복하는 민주선거의 미덕까지 보였겠는가. 그러나 박 후보의 입장에선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조심스럽다는 것도 인간사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버지가 일으킨 쿠데타라는 과거사를 현재의 자식에게까지 억지로 덧씌우려는 것도 결코 민주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 체제에선 박 후보도 어디까지나 박후보의 자질과 경륜으로 심판받을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