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학자에게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 학자의 대답은 아주 간단 명료했다. 첫째로 역사는 인간사의 판례집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재미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셋째는 자기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도 드문 역사책이라 한다. 500년 왕조 동안 임금과 신하가 아침부터 조정에 모여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안건을 가지고 누가 어떤 내용의 발언을 했는지 그 외에도 다른 이야기들가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조선조는 `역사의 나라`였다. 그 내용도 아마추어가 재미로 쓴 것이 아니라 선발된 엘리트 사관이 사명감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다. 왜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역사적 집필에 정력을 쏟았는가? 그만큼 후세에 내려질 판결을 의식하면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 기록들은 후손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판례집`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역사나 재판의 판례는 많은 참고자료가 되는 유일한 문서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축적과 판단의 정확도는 비례한다. 고려의 일연이 쓴`삼국유사`는 역사라고 하는`거대한 이야기 보따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구약은 어떤 학자는 유태민족의 역사책이라 한다. 구약의 앞부분은 유태인의 족보 이야기이다. 유태인들은 자기의 역사를 종교화 시킨 것이라 한다. 2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도 결국 조상이 살던 땅을 되찾아 이스라엘을 세웠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의 떠돌이였던 그들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조국을 그리는 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정신은 구약에서 나왔으며 구약이 정체성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도 한번 반추해 보자. 삼국시대의 이야기는 너무 먼 이야기라서 접고 6·25 한국전쟁부터 한번 살펴보자. 거지나 다름없었던 나라가 경제대국의 대열로 진입한 것도 국가의 뿌리인 정체성이 확고한 탓인데 그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손경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