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살로메 소설가
여념 집 마당엔 홍매화 피고 야산마다 노란 생강꽃 물들었다. 눈으로 보는 봄은 저만치 와 있는데 내 몸은 아직 봄 채비에서 한참 멀다. 워낙 추위 타는 체질이라 외출할 때면 여전히 내복을 챙겨 입는다. 그래도 손발은 차고 무릎과 등짝은 시려온다. 하지만 몸이 겨울이라고 마음마저 겨울로 머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수록 봄맞이를 적극적으로 해야지.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렵게 꽃구경을 가기로 약속을 해 놓고도 내 쪽에서 일정이 맞지 않아 미뤄야만 했다.

정녕 내게 봄은 멀기만 한가, 하고 있을 때 마침 지인이 미나리 파티에 초대했다. 막 시작한 봄인데 미나리 농사는 벌써 끝물이란다. 제대로 된 미나리 철은 이월 말에서 사월 초까지란다. 서둘러야 미나리의 그 오묘한 맛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단다. 아니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나.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어렵게 몇 사람이 모였다. 그리하여 올해의 내 봄맞이는 꽃구경이 아니라 미나리 맛 기행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지하청정수로 재배한 봄 미나리는 생으로 먹을 때 그 독특한 향을 살릴 수 있지만 삼겹살과 곁들일 땐 익혀도 제 격이었다. 혀를 즐겁게 하는 것 이상으로 내 눈을 오래 머물게 한 건 비닐하우스 속 그 푸른 행렬이었다. 맺힌 데 없이 싱싱하게 푸르른 미나리를 보고 있자면 봄은 미나리꽝에서 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나리 재배지는 실은 수몰지라 했다. 만수위(滿水位)만 되지 않으면 드넓은 땅은 경작지로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노는 땅을 이용해 미나리를 재배하고, 그 이익금이 마을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고향이 수몰지역인 나로서는 이런 사실이 부러웠다. 고향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타지로 떠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내 맘을 알 리 없는 남편을 졸라 내 고향으로 향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무람없이 가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번 나들이는 아련한 수몰지에 대한 기억을 깨쳐준 저 미나리꽝 덕분이 틀림없다.

호우기가 아니라 멱찬 물이 되지 않아서 드넓은 들은 그대로 제 몸을 드러냈다. 옛 집터 자리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십 년 전 어린 눈에 비치던 마을의 위용과 풍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버려진 그 땅엔 올 때마다 다른 식물군이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자연적인 것도 있었고 인위적인 것도 있었다. 경작하지 않고 노는 땅일 때에는 내 생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상야릇한 야생꽃들이 수몰지를 뒤덮었다. 어느 해 늦봄 그곳에서 그 꽃을 보았다. 나는 고향 떠난 누군가의 혼백이 뿌려 놓고 간 향수일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해는 양배추 농원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어차피 노는 땅이니 어떤 객지의 농사꾼이 자신의 호기 팽배함만 믿고 씨를 뿌렸을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양배추 밭을 보면서 그래도 누군가 그 땅을 활용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달 쯤 뒤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엔 만수위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버려진 땅을 활용한다는 건 무모함을 시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때를 알 수 없이 강수량에 의존하는 게 수몰지의 운명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저만치 집터 근처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아직은 매서운 꽃샘바람이었다. 사람 잃은 무참함을 그저 견뎌야했던 땅덩이로서의 회한이 저 돌풍에 휘감기고 있었다. 그 아릿한 땅의 말씀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애꿎은 셔터만 눌렀다. 원시의 건강함이나 의연한 땅심을 갖추지 못한 수몰지는 내게 가없는 안타까움이었다.

너무 적요하고 고즈넉한 그 풍경 속을 앓다 보면 어느새 현실감을 놓쳐버린다. 애틋한 사향심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그곳을 쉬 지우지 못하는 건 여전한 의문이다. 이 봄, 미나리꽝으로도 남지 못하는 모든 마음의 폐허와 허무를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