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살로메 소설가
아침마다 돈나무 화분을 들여다본다. 나무 이름처럼 부자 되라고 지인들이 집들이 선물로 준 것인데 부자 되는 것보다 더 나은 눈요기가 생겼다. 하루 같이 내 눈을 그쪽으로 돌리게 하는 건 바로 버섯 때문이다.

어느 날 선잠을 깨 화분에 물을 주려는데 신기한 것이 눈에 띄었다. 흙더미를 뚫고 버섯 한 송이가 우뚝 솟아 있는 게 아닌가. 푸른 이끼를 뚫고 나온 앙증맞은 버섯은 제 집이라 텃세하는 돈나무의 위세에 전혀 기죽지 않고 고매하게 목울대를 치켜 올리고 있었다. 분명 간밤에는 뵈지 않던 것이었다. 아침엔 종 모양으로 스스로만 감싸던 녀석이 점심때가 되자 치마폭을 펼쳐 세상 근심을 다 품어 안을 호기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 기개가 너무 놀랍고 의심스러워 독버섯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별을 위협하는 바오밥나무의 어린 순을 뽑아야 하는 어린왕자처럼 그 버섯을 퇴치해버릴까 하는 고민을 잠깐 했다. 하지만 `돈나무와 더불어 사는 독버섯` 콘셉트도 괜찮아보였다. 까짓것 둘 다 키워보지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나무로 대변되는 소박한 꿈과 독버섯으로 은유되는 지나친 욕심의 경계. 그 속에서 생활의 균형 감각을 얻어야지, 이런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한데, 볼일을 보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그 버섯은 사라져버렸다. 돈나무 화분 속을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잡초라고 생각하고 남편이 뽑아버렸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줄기가 말라비틀어진 녀석은 바람에 밀렸는지 구석에서 죽어있었다. 며칠을 두고 관찰한 끝에 그 버섯의 생애에 관해 알게 되었다.

녀석의 비밀은 이러했다. 밤새 조금씩 피어나 아침에 팽팽하게 부풀어 한낮이면 활짝 피었다가 저녁이면 저 먼 우주로 고꾸라지는 하루살이 버섯이었다. 오늘 피어난 버섯이 죽고 나면 그 옆에 새로운 놈이 내일 돋아나는 식이었다. 내 맘대로 `하루살이 버섯`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런 버섯에 관한 정보가 있나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맙소사! 똑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 버섯의 한살이를 사진과 함께 올려놓았다. 버섯의 학명도 성질도 모르지만 그 버섯의 한살이를 신기해하는 것은 모두 같았다.

돈나무에 기생하는 하루살이 버섯. 아무 의미 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버섯이든, 이로운 것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념들로 생활 속 균형을 잃을 때 스스로 돌아보라는 의미로 그 버섯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생기는 욕심, 때때로 얽히는 오해, 일생의 짐 같은 게으름을 들여다보는 거울로서 녀석은 내게 온 게 틀림없다.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 삶의 기본 가치는 누구나 잘 안다. 성실할 것, 최선을 다할 것, 배려할 것, 입 조심할 것, 감사할 것 등등. 따지고 보면 일상이 근심으로 얼룩지는 건 이런 선(善)의 기준에서 자신을 놓아버렸을 때이다.

오늘 하루도 나는 너무 많은 잠으로 시간을 낭비했고, 저녁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을 무너뜨렸으며, 가벼운 입방정으로 스스로에게 실망을 안겼고, 지인들의 도움에 제대로 된 감사함을 표현하지 못했다. 이런 후회와 번민은 큰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사소한 데서 생긴다. 불쑥불쑥 솟는 이러한 근심을 하루에 한 개씩 내려놓기. 그리하여 하루살이 버섯처럼 날마다 죽어서 거듭나기.

매일 아침 버섯 거울을 내 맘 속에 세 들인다. 욕심 하나 비운 자리에 다른 근심거리가 대체되더라도 새로워지고 거듭나기 위해 버섯 거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볼 일이다.

내일이면 죽은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버섯이 돋아날 것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