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의소설가
설 연휴 때 모처럼 혼자 지낼 시간을 가졌다. 물론 설날 당일은 가족과 함께 고향을 다녀왔지만, 이틀 동안은 온전히 혼자였다.

비워둔 시골집으로 들어가 밀린 청소를 하고, 연탄보일러를 피우고, 마당을 정리하느라 한나절을 분주하게 보냈다. 진공청소기를 돌리다보니 장판 위를 굴러다니는 먼지 덩어리가 만만치 않았다. 먼지라는 것이 사람이 살 때보다 비어 있을 때 더 생기는 것이 신기했다. 일주일을 비워두었을 뿐인데, 사람이 자취를 감추니 먼지도 외로워서 서로 엉겨 붙어 켜켜이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일은 연탄재를 수레에 실어내 산길의 움푹 파인 곳에 깨뜨려 메우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 위에서 땅거미가 내려와 주위는 금방 어두컴컴해졌다. 빈 수레를 끌고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어둑한 처마 아래서 삐! 삐! 하고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앉아 있으려니 문득 외로움이 밀려와 마음이 심란했다. 설 명절이면 유독 그리워지는 부모님 생각에 고향 생각까지 겹쳤으니 그럴 법도 했다. 떨어져 있는 가족 생각도 유난했기 때문에 마음이 아렸다. 그럴 때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칫 우울과 고독을 떨치려고 집을 뛰쳐나갈 수가 있다. 시내에 나가 사람의 훈기가 가득한 카페에 들려 커피를 마시며 외로움을 잊거나, 친구를 불러내 수다를 떨거나, 영화를 보면서 혼자라는 것을 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당장의 외로움을 잊게는 해주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집 나서기를 멈추었다. 대신 고요한 저녁의 풍경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들여다보았다. 한 겨울의 저녁 풍경은 무심(無心)했다. 바짝 마른 단풍나무와 울타리로 심어 둔 조팝나무와 아직 잎이 붙어 있는 복자기 단풍나무의 초연함이 나의 심난한 마음을 부끄럽게 했다.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들고, 서쪽 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풍경도 아름다웠다. 보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들은 저마다 생생하게 자신의 시간을 엄격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도 그들의 저녁 풍경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선물이 되자고 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이 두려워 이런저런 모임을 만들고, 서로 정기적으로 만나 수다를 떨고 위로를 받고는 한다. 저마다 직장과 환경에 따라 하루, 한 주일, 한 달, 일 년을 바쁘게 사느라 정작 혼자 놓여있을 때가 드물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온전하게 홀로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온전히 홀로여야 할 시간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 고독의 시간이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모를 뿐이다. 고독을 향해 가면서도 정작 고독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꼴이다. 수십 년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거나, 갑자기 일자리를 잃거나 하면 어느 날 갑자기 고독의 시간이 온몸을 감쌀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굳이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이가 들고 체력이 떨어져 문득 `나 혼자 이 세상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소름끼치는 고독을 맞보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월든`의 저자 소로우와 같은 선지식은 홀로 있기의 소중함을 체험을 통해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하루하루의 흐름이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일상의 분주함이 갑자기 멈출 수 있음을 준비해야 한다. 바쁜 시간이 느릿느릿해지고, 친한 친구들이 자취를 감추고, 지구 위에 혼자만 뚝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이 소나기처럼 다가올 시간을 대비해야 한다면 너무 노인네 같은 소리일까?

설날 연휴 홀로 집을 지키면서 모두가`홀로 있기 연습`을 해둘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는 일부러라도 홀로 있는 시간을 한번 쯤 가져보았으면 좋겠다. 정치인의 경우 더욱 더 그런 을씨년스러운 고독 연습이 좋은 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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