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살로메 소설가

오늘은 아침부터 그 주제와 맞닥뜨렸다. 평소대로 나갈 준비를 했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내 오전 스케줄은 주로 열시에 시작한다. 일이든 취미든 대개 그래왔는데 주부들이 짬을 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오전 시간이 그 때일 것이다. 한데 오늘은 열시 반에 약속이 잡힌 날이다.

시간을 쪼개가며 바지런 떠는 형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준비된 상태의 비는 시간이 아까웠다. 마침 화장실에 남편이 보던 책이 있길래 집어들었다. 지겨운 자기 개발서라니! 하면서 아무 데나 펼쳤다. 맘에 쏙 드는 구절이 나온다. 메라비언의 법칙이란다. `메라비언은 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이 55%, 청각이 38%, 언어가 7%라는 사실을 발견한 심리학자다.(중략) `마음으로 리드하라 “- 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127쪽)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 열심히 수다를 떤다. 이름하여 건전한 책 수다. 눈빛이 형형한 한 멤버 차례가 되었다. 그미는 눈동자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단다. (그 때 우리는 이태석 신부님의`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미는 사람을 볼 때 눈동자를 눈여겨본다고 했다. 자신이 밑줄 그어 온 부분을 성심껏 읽어 주었다. 가난과 전쟁 때문에 신뢰를 잃은 아이의 탁해진 눈빛을 묘사한 장면이었다. 환경에 따라 순한 사람의 눈망울이 얼마든지 살기 서린 눈빛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안타까운 장면이 계기가 되어 그미는 사람의 눈동자에 대해 떠올린 모양이었다. 상대의 눈동자를 보면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단다. 백퍼센트 확신할 순 없지만 통밥(?)으로 알 수 있다나. 맞는 말이다. 아침에 읽은 메라비언의 법칙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심리학자들은 메라비언과 같은 결론을 숱하게 내렸다. 사람은 혀가 아니라 몸으로 말한다고.

내가 좋아하는 모 작가는 눈빛이 참 불편하다. 직접 뵌 적은 한 번도 없는데 화면 속에 비치는 그의 눈빛을 볼 때 안타깝기만 하다. 카메라와 인터뷰이가 불편한 작가는 눈길을 어디다 둬야 될지 몰라 시종 눈치를 보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작가의 그런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집중하기가 힘들다. 자고로 사람은 몸으로 말하고, 그 중 눈빛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을텐데 삐딱한 시선으로 훔쳐보는 듯한 모양새는 신뢰감을 떨어뜨린다. 아무리 좋게 봐줘서 카메라 앞의 쑥스러움 때문이라 하더라도.

상대와 자연스레 눈길을 맞추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 숫기 없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가정 방문 오신 선생님을, 놀러 온 오빠 친구를 당당하게 쳐다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사람을 키우는지 지금은 그런 울렁증이 많이 없어졌다. 몸 언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혀 언어 매너가 좋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배울 게 많다. 동의를 구하는 상대에게 리액션으로 장단 맞춰주기, 아이디어나 조언 요청에 적절한 필터링해주기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람은 상대적이라 몸 언어를 항상 좋은 쪽으로 발동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어쨌거나 말보다 몸이 더 많은 말을 한다니 말 조심 뿐 아니라 몸 조심도 해야겠다. 좋은 언어 습관도 연습이 필요하듯 몸으로 하는 말도 갈고 닦아야 한다. 우선 부정의 몸 언어부터 버릴 일이다. 혀에 든 욕보다 눈에 든 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리액션 없는 무표정, 타인의 약점을 못견뎌하는 냉소의 눈빛부터 덜어낼 일이다. 오늘도 나는 내 탁한 눈빛과 이지러진 표정을 맑고 밝게 해줄 멘토를 찾아 길을 나선다. 그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도처에 있을 것을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