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

우리는 우주를 `무한대로 크다`고 말한다. 우주가 언제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인간은 모른다. 그들은 작은 머리로 생각해 우주의 시작으로 빅뱅설(big bang theory)을 주장하기도 한다.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커지고 있다고 하나, 이것은 학설 중 하나다.

또 우주에서 시간은 스스로가 우주와 함께 존재할 뿐 인간은 시간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다. 시간은 원래 태양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무한대의 전체 우주를 이루는 하나의 속성이다.

우리는 태양계의 주기를 중심으로 달력을 만들고, 시계를 만들어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둔다. 시계를 만든 이유는 세월의 길이를 측량하지 못해 삶에서 불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인간이 추위나 더위도 없이 그리고 언제나 배부르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면 일부러 시간을 토막 내는 시계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없었다면 문화도 문명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란 단어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어짜피 수명이 다 하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시계의 시, 분, 초를 따라, 시점과 속도를 알아낸다. 그 표현으로 우리는 `시간이 빠르다. 또는 길다`라는 등으로 부른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태어난다`는 것은 곧 출생 순간부터 한계의 틀 안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시간이라는 환경이 없다면, 삶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어떤 우주 설(說)에는 우주의 가장 작은 원소 하나에 까지, 우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도 우주의 모든 정보와 방식을 담아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늦고 빠름이라는 시간의 속성에 묶여 있는 인간은, 우주 전체 원리의 일부분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몸은 소우주(小宇宙)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소우주라면 무한대의 우주에 포함되는 한 부분이 된다. 그래서 우주는 나의 속성이자 나 이외의 모든 것의 속성이 된다. 모두가 하나(唯我)가 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된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 졌지만 우주의 존재를 고민해 보는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그는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초월된 세상에 이를 수도 있겠다. 노력하면 영적인 세계 즉 우주적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영생이나 해탈이라 할 수 있다.

한 원소는 다른 종류의 원소와 각각 상대성 원리에 적용받는다. 즉 원소는 절대적 우주의 하나이면서, 상대성도 갖는 완전성을 갖는다. 이러한 절대성과 상대성은 서로 하나로 돼 무수히 굴러간다. 시간을 초월하는 이것을 윤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우리는 시간에 포위당해 있다. 자본주의 원리에 에워싸여서 시간은 곧 돈이 되고, 힘이 되면서 삶의 수준을 측정하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 내가 물건을 산다면 그 물건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시장의 매매란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사고파는 것이다. 즉 상업이란 시간을 사고파는 것이다. 은행도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여 거래를 이루는 곳이다.

사회는 시간의 활용능력 정도에 따라 사회계층과 삶의 구역이 나눠지고 시간을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는 소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초과 근무를 한다든지 투잡을 가져서 살아가는 시간을 벌기도 한다. 어떤 이는 물가조작을 하거나 사기 술수로 남의 시간을 훔치기도 한다.

가난해 시간을 벌지 못한 자와 풍부해 여유가 있는 자와는 같은 행위라도 수행하는 속도가 다르다. 부자가 비행기로 시간을 아끼면서 중국 북경을 갈 때 가난한 자는 배와 버스를 타고 많은 시간을 들여서 그곳으로 간다.

시간은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은 우주와 존재의 없어짐을 의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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