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 기자의 청탁 전화에 시달리는 것도 귀찮고, 저러는 심정도 오죽할까 싶어 새해부터 시간 나면 한 꼭지씩 써주겠다고 선심 쓰는 척한 게 화근이었다. 이리저리 통화를 미루는 사이, 벌써 새 집필진 관련 사고(社告)는 나갔단다. 발을 뺄 수 없게 만들었으니 담당 기자가 고단수임에 틀림없다. 코너 제목, 글 쓰는 방향, 소재거리 등 모든 걸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당장 시작이라니!
게으름을 물리치고 발딱 일어나긴 했다. 하지만 책상 앞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하다. 그간 글 좀 쓰고 싶다는 욕구는 빈둥거리는 내 안의 악마 앞에서 거의 백전백패였다. 쓰고 싶다는 열망과 쓰는 행위의 간극은 히말라야 설원의 크레바스처럼 깊고 아득하기만 하다. 어느 작가가 말했단다. 침대에서 일어나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으로 가는 길이 가장 먼 길이라고.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겨운지를 잘 말해주고 있어 절로 공감한다.
평생의 과업처럼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치면서도 정작 진득하니 엉덩이 붙이고 쓰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게으름 탓이다. 그 어떤 면죄부도 바랄 수 없는 명백한 자기 발전의 적 게으름. 그걸 잘 알면서도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핑계거리만 찾았다. 생활인으로서 품위유지비도 벌어야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책임감도 완수해야 하고, 주부로서 집안일도 건사해야 하고. 나열할 가치조차 없는 이런 핑계들은 내 박약한 의지의 이음동의어에 지나지 않는다. `백수 과로사한다`는 시쳇말처럼 실속 없이 바쁜 척해가며 자기 위안을 삼았지만, 그건 글 못 쓴 것에 대한 변명은 결코 될 수 없다.
어떤 일이든 습관이 성패의 반을 좌우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 쓰는 습관에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았다. 삶이 구차하고 굴욕적이고 쓰라렸던 한 때, 단 하루도 쓰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 시절도 있었다. 내면의 절실한 요청에서 쓴 글은 그대로 위안이 되고 카타르시스가 되고 삶 그 자체가 되었다. 일상이 힘겨웠지만 쓸 수 있다는 희망 덕분에 견딜만할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쓰지 않고도 평온이 보장되는 타협 이후에는 쓰는 것 자체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써야 하는 절박함의 자리를 꿰찬 애매한 평화의 시간들은 겉으로는 안온해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늘어나는 엉덩이 비곗살과 미련해진 감각 뿐.
스스로를 향한 채찍처럼 시작한 글쓰기가 내 안에선 숨은 별, 나가서는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연재를 시작한다. 절절한 욕구는 순정한 목표를 낳고, 그 목표는 좋은 습관을 낳고, 그 습관은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억지 위안을 삼으면서. 크게 쓰거나 많은 걸 보여주려는 욕심은 애초에 없다. 다만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리는 짧은 생각 한 두레박으로도 만족할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코너는 요즘 유행하는 관용구인 `생활의 발견`이란 이름을 빌려와도 좋겠다.
새해, 새 결심처럼 내 안의 허영덩어리 하나 해처럼 솟구친다. 실은 새로울 것도 없는 그 덩어리가 내 몸이, 내 맘이 원하는 절절한 쓰기의 실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침대에서 글 쓰러 가는 책상까지의 거리가 아주 먼 길이 아니라 조금은 가까운 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