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흠 시사칼럼니스트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변해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철칙이 돼버렸다. 특히 새로운 천년이 시작됐을 무렵, 해가 바뀔 때, 선거가 있는 시기에 변화를 금과옥조로 강조했다. 올 새해엔 양대선거가 끼어 있어 신년벽두부터 변해야 한다는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있다. “마누라만 빼고 모두 바꾸라”든지 하는 변화를 강조하는 극단적 표현들도 이제 식상할 정도다. 그렇다면 올해는 뭐든 바꾸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인가.

물론 변화는 세상의 근본 원리이다. 변하지 않으면 생명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도 신진대사의 변화가 정지되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특히 디지털 시대는 생활방식이 아날로그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만큼 이같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는 필연적이다. 선거에서도 잘못한 정치인과 집권세력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고 발전이 없다.

그러나 변화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변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며 변하고 있다. 쉼 없이 흐르는 물도 흐름 자체만 보면 변화가 연속되지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원칙은 만고불변이다. 육체가 늙어가는 인간도 어려서부터 노령에 이르기까지 겉모습은 크게 달라져도 자기 자신임을 지키는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어릴 때 홍길동이가 100세가 된다고 김길동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변화도 따지고 보면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 그 자체가 목적일 뿐 수단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든지, 인권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고 국가는 국민이 주인이라든지, 사회는 법치주의 방식에 의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지켜져야 한다든지 등은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변화지상주의 풍조 때문에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마저 바꿔버린 일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 같다. 무조건 “바꿔! 바꿔!” 하는 세태 때문에 소중한 가치들이 상실되고 경망한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곳으로 빠져드는 방향감각 잃은 세상이란 생각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마치 망망대해에서 배의 방향을 잡는 자이로스코프가 중심축을 상실하고 회전체가 외부환경의 변화만 쫓아가는 꼴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최근 중학생들의 잇단 왕따 자살만 해도 그렇다. 학교의 중심가치인 인성교육과 사회성 함양이 무시된 것도 교사가 스승이 아닌 교사 봉급생활자로 바뀐 결과에서 빚어진 것이다. 참교육을 부르짖는 전교조의 등장이 학교를 바뀌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죽음의 왕따 교실이 등장한 데서 보듯 그것은 방향상실의 변화인 것이다. 정치도 선거 때만 되면 바꿔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바꾼 결과는 민주정치의 기본인 갈등해소 기능과 의회민주주의의 실종을 가져왔을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어떤 자질과 경륜을 가진 정치인으로 물갈이를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보다 무조건 바꾸고 보자는 데 너무 급급했던 것 같다. 실체를 알고 바꿨다기보다 이미지만 보고 바꾼 것이다.

가장 잘못된 변화를 지적한다면 종북세력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는 변화였다. 지난 군부정권 시절 정치탄압의 수단으로 민주인사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빨갱이란 올가미를 씌웠던 것이 가장 큰 범죄였다면 이제 종북세력을 `진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사회를 오도하는 방향상실의 변화인 것이다. 일제의 천황우상화를 흉내내고 있는 북한 정권은 이미 김일성 가족 3대가 국가의 주인이 되는 반인권적 파쇼사회임을 만천하가 알고 있다. 이를 추종하는 세력을 변화라는 시대적 가치에 포함시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변화인 것이다. 물론 이번 양대 선거에서도 바꿀 것은 바꾸어야겠지만 불변적 가치는 지키는 선택이라야 희망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짝퉁 변화와 방향상실의 변화는 눈을 부릅뜨고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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