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 `ASIA`발행인·작가
24년 전 이맘때는 드디어 내 인생도 삼십대의 문지방에 닿은 초겨울이었다. 세계의 변혁에 대하여 진정으로 고뇌하는 인간은 삼십대라는 시절에 청춘의 순정한 열정적 관념을 전략으로 가다듬는다. 또한 그것을 자신의 신념과 사상이라 자부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대하여 `진보와 정의와 선(善)을 위한 투쟁`이라 확신한다. 마르크스, 히틀러, 호치민이 그랬다. 하얼빈 역두에서 권총을 쏘는 안중근은 삼십대였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도 삼십대였다.

존재의 본질, 세계의 변혁에 대한 탐구와 번민으로 술을 마시며 청춘을 탕진한 즈음에 맞이한 삼십대의 문지방에서 나는 폭음의 음주벽에 휘둘리고 취할수록 `더러운 것들`에 대한 분노가 더 명징해지는 인간이었다. 이미 작가였지만 작중 인물의 고민과 발언은 늘 술잔에 담겨 있었다. 건강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쓸쓸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작가가 된 것` 외에는 보잘것없는 청춘을 보냈을지언정 삼십대의 문지방에서 공자의 그 `이립(而立)` 하나만은 이루었노라 자위(自慰)한다. 권력욕, 물욕, 명예욕과는 떨어진 곳이었지만 나의 `이립의 묘목(苗木)`은 한국적 상황과 세계적 변화라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작가정신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겠다는 신념이 확고했으니, 그렇게 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4년 전 초겨울, 1987년 11월 하순, 그때 한국인은 온통 대통령선거에 몰입해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민주화 세력의 분열이 `보통사람 노태우`를 당선시킨 선거. 그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나는 이렇게 썼다. “소아적(小我的) 권력욕의 늪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한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과 배반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려는 창문처럼 활짝 열리고 손주를 안은 할아버지처럼 너그러워질 수 있는 문화적 전환과 도약의 발판을 팽개친 역사적 죄악이다”

그리고 이태가 더 지난 1989년 11월9일, 20세기 후반의 지구에서 `세계사를 변혁한 지도자`라 칭송되어 마땅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미모의 아내와 함께 브란덴부르크 문에 나타나 환한 웃음의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역사는 늦게 오는 자를 처벌한다” 바로 베를린장벽이 허물어진 순간이었다. 그것은 현존 사회주의체제가 연쇄 붕괴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때 인간의 윤리의식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져 있던 나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사회주의를 할 수 있는 천부의 윤리적 자질이 크게 부족하다. 이념이 인간 조건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조건이 이념을 창조하며, 인민이 체제를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렇게 태어난 나의`이립의 묘목`은 삼십대와 사십대를 다 지나고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진 현재에 이르러 제법 무럭무럭 자라났다.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하루에 사상이 하나씩 죽는` 연령대라고 모질게 질타한 사십대에 그와는 반대로 살아야 한다며 엔간히 자신을 책망하며 까칠한 언행을 마다하지 않은 결실인지 모른다.

생태를 위한다며 운전면허증을 안 따고 골프를 안 했다. 여전히 안 한다. 현재는 운전도 골프도 하기 싫어서 안할 뿐, 거창한 이유는 없다. 개인용 컴퓨터 시대에 홈페이지를 외면했다. 팬을 관리한다? 팬과 소통한다? 아니, 세계를 향해 발언하는 창이다? 우스워 보였다. 한낱 명예욕에 휘둘린 작가들의 멍청한 짓거리로 보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해 잘난 사람들이 트위터 따위에 권력의 목을 매달고 있는 형국인데, 나는 끝내 그것을 외면하는 구닥다리로 남을 작정이다. 이렇게 쓸 것이기 때문이다. “손가락에 두뇌를 달고 다니는 괴물들이 지하철과 버스와 거리에 우글거리는데, 괴물들의 두뇌는 흔히 140자 이내의 재치 넘치는 야유와 풍자를 찾아내느라 몰두한다. 그것이 괴물들의 어느 하나를 일약 스타로 뜨게 만들고 그러면 `로또 당첨` 같은 것이 스타 괴물에게 도래한다. 김어준 따위에 열광하는 괴물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어느덧 나의 `이립`의 나무에는 연민의 가지도 많아졌다. 그것은 나에게 이해와 인내를 가르친다. 그러나 나의 `이립`의 나무는 줄기 속에 아직도 묘목 시절의 신념을 혈액으로 간직하고 있는 모양이다. 혼자서 걷는 동안에 `이윤의 쳇바퀴를 돌고 또 돌아야 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운명`에서 스스로 직업적 자부심마저 버린 인간은 스스로 이윤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분노해야 하는 것에 분노하지 않아서 `나쁜 일`이 되는 경우에 대하여 자꾸 무뎌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나무라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의 단 한 번의 귀중한 실험이다. 모든 인간의 생애는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헤르만 헤세의 말이다. 미완으로 끝내도 그 길을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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